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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는 함축적으로 일러주는 인생의 사구게

  • 불서
  • 입력 2021.10.15 22:27
  • 수정 2021.10.16 09:52
  • 호수 1605
  • 댓글 1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동명 스님 지음 / 조계종출판사 / 120쪽 / 1만4000원

출가 전 중진시인이었던 저자 한국 선시들 시적으로 풀어내
일상 안 떠나는 게 선시 매력...여유와 평안의 지혜로움 선사

사진설명 : 선이 온갖 번뇌를 끊어내고 지금 여기에서 지고의 평안함을 지향하듯 선시는 일상을 살아내되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함을 보여준다. 그림은 김명국의 노승도.
선이 온갖 번뇌를 끊어내고 지금 여기에서 지고의 평안함을 지향하듯 선시는 일상을 살아내되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함을 보여준다. 그림은 김명국의 노승도.

빠름과 바쁨에 매몰된 채 타인의 욕망을 덩달아 욕망하며 휩쓸려 살아가는 일상. 문득 깊은 탄식과 더불어 ‘왜 이렇게 살까’ 짙은 허무에도 젖지만 남에게 뒤처질세라 또다시 그 질주의 대열에 오르곤 한다.

시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브레이크다. 관성의 메커니즘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게 하는 관찰자로도 만든다. 그리하여 일상을 알아차리고 시든 감성을 일깨우며 삶의 성찰을 이끌어낸다. 선시도 그렇다. 선이 온갖 번뇌를 끊어내고 지금 여기에서 지고의 평안함을 지향하듯 선시는 일상을 살아내되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선시는 시의 본령인 깨어있음과 일깨움에 더 투철할 수 있다.

동명 스님이 선시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생 진리를 찾고, 진리를 체득해, 진리를 실천했던 선사들이 남긴 시는 삶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 태고보우, 진각혜심, 청허휴정, 나옹혜근, 사명유정, 함허득통, 초의의순 등 32명의 선사들이 남긴 선시들을 번역해 소개한 책이다. ‘동명 스님의 선시에서 길 찾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선시에 담긴 의미를 쉽게 풀어내고 자신의 체험과 관점을 곁들여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평안함을 선사하고 있다. 자칫 딱딱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선사들의 시를 시적으로 유려하게 풀어내고 있는 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스님은 출가 전 시인이었다.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94년 다시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20여년 간 활동했다.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등은 출가 전 스님이 쓴 시집들이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중진 시인이었던 스님은 2010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44세 되던 해였다. 주변 문인들 모두 놀라워했고, 소설가 박범신 선생은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세계를 당신이 먼저 가오!”라며 부러움과 격려가 담긴 엽서도 보내왔다.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늦어졌다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동경했던 시절인연이 비로소 도래했는지 모를 일이다.

시를 뒤로한 채 산문에 든 스님은 중앙승가대 역경학과에서 공부하고 은사 지홍 스님의 부탁으로 북한산 중흥사에서 오랫동안 소임을 살았다. 대학원을 다니고 도량을 일일이 관리하는 등 바쁜 나날들이었다. 시끄럽고 바쁜 게 싫어 세상을 떠나 절로 들어왔는데 이곳도 비슷했고, 절에 와서도 떠날 이유는 여전히 존재했다. 시가 다시 들어온 것은 그 무렵이다. 이번에는 선시였다. 그곳에는 여유로움과 평안함이 있었다. 스님은 어디든 시끄럽지 않은 곳은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세상사 속성을 탓할게 아니라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동명 스님. 조계종출판사 제공
동명 스님. 조계종출판사 제공

스님은 한국의 옛 선사들이 쓴 선시들을 두루 찾아 읽었다. 선시에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탈속의 멋뿐 아니라 꽃을 감상하고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가하면, 고향이나 떠나가는 도반을 그리워하는 시들도 있었다. 다만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무엇보다 선시의 매력은 직관이 번뜩이면서도 결코 일상과 평심을 등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서쪽에서 오신 뜻 알고 싶으면 저 솔바람 소리 들어보아라’던 백운경한 스님의 시에서처럼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자체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스님은 선시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삶을 가만히 돌아보기도 하고 초발심도 되새겼다. 선시는 자신뿐 아니라 바쁜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큰 이익이 되리라 확신했다.

스님의 말마따나 선시는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일러주는 우리 인생의 ‘사구게(四句偈)’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고구정녕하게 일깨워주는 까닭이다. 세상에는 시간 나면 읽어도 좋을 책이 있고, 시간을 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선심과 시심이 담긴 이 책은 후자에 해당하는 드문 책일 듯싶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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