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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정관 스님이 사명당에게

기자명 이재형

군복 벗고 납의를 되찾으라

아아, 법이 쇠했는데 세상까지 극히 어지러워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승려들도 편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승려가 속인의 옷을 입고 군사로 몰려 나가 동서로 쫓겨 다니면서 혹은 적의 손에 죽고 혹은 속가로 도망치니, 속세의 습관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가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계행(戒行)을 아주 폐하여 빈이름을 구하여 불처럼 달리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선풍(禪風)이 장차 그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옛 성현들은 부귀를 뜬 구름 같이 보고 청빈의 즐거움을 고치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승려의 거취가 세속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으니 지금 왜적은 물러갔고 큰 공은 이미 이루었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하기보다는 그냥 떠나버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원컨대 갑옷 대신 납의(衲衣)를 다시 걸치고 깊은 산에 들어가 반야의 산에 오르거나 자비의 배를 타고 곧바로 보리의 피안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승병 이끌었던 유정에게

수행에 전념할 것 강조

승병제도 부작용도 지적


조선중기의 선승인 정관 일선(靜觀一禪, 1533~1608) 스님이 사명당 유정(1544~1610)스님을 향한 일갈이다.

15세에 출가해 평생 가난을 벗하며 수행에 매진했던 정관 스님은 편양, 소요 스님과 함께 서산대사의 3대 문파를 형성했을 정도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이런 스님이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당에게 편지를 써 이제 군복을 벗고 출가자의 본분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스님은 먼저 유정 스님이 ‘돌과 같은 마음과 소나무 대나무와 같은 절개가 있어, 검은 물을 들여도 검지 않고 갈아도 닳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승려로서의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 있는다면 결국 세속에 물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정관 스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전쟁이 끝났으니 당장 입산해 다시 불도를 닦으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스님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승병 활동의 부작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계율을 지키며 용맹정진해야 할 스님들이 전쟁터로 나가 수행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나마 돌아온 스님들도 세속의 물이 들어 수행이나 계율을 등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스님은 승병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외적의 침략 앞에 맞서 싸우는 것이 과연 출가자의 본분인지에 대해서는 유정 스님과 엇갈린 시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정 스님이 선조의 명을 받고 강화를 맺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한탄하며 ‘곧 바닷가로 달려가 전송하고 싶사오나 갈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돌아올 동안 내가 죽지 않으면 깃발을 돌리는 그날을 기다려 나아가 뵙고 축하드리겠습니다’란 편지를 보낸다. 또 스님은 관세음보살 전에 유정이 불가사의한 가피를 입어 적의 소굴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해달라며 올린 간절한 기도문은 정관 스님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 수 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경전 보급과 후학양성 등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깊이 참여했던 정관 일선 스님.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죽비 대신 칼을 쥐어든 사명당과 한평생 삼의일발(三衣一鉢)의 수행자로 살았던 정관 스님 중 어느 쪽이 바람직했는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국난 앞에서 민중의 고통과 승단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아파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하다.

이 편지를 비롯한 스님의 삶과 깨달음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은 현재 『정관집』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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