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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화청지를 거쳐 란저우로

기자명 이재형

깊은 협곡에서 만난 민초들의 고달픈 삶

<사진설명>시안에서 란저우로 이어진 협곡마다 온통 밭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힘겨운 삶의 무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까지 농사를 짓게 했으리라.

병마용갱과 대자은사를 뒤로 하고 화청지(華淸池)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유명 관광지 어디나 그렇듯 화청지 앞에도 상점들과 노점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주차장 앞 공터에는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이 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다.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도 등장하고 있듯 이곳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이 환영처럼 서려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제법 운치를 더해준다. 화청지 내에 20∼40위엔을 내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대중온천목욕탕도 그런대로 어울리는 편이다. 위로 조금 올라가니 양귀비가 ‘은총의 목욕’했다는 그 유명한 화청궁이 눈에 들어온다. 기와지붕 안에 욕조가 있어 ‘목간’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다소 썰렁한 감이 없지는 않다. 그 옛날 여기서 당대의 풍류가 현종과 희대의 미녀 양귀비가 온천수보다 뜨거운 사랑을 나눴을 것을 떠올리니 느낌이 새롭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풍운의 여인. 서양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양귀비가 있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불륜이었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비춰지는 건 어쩌면 비극적으로 끝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진 임금으로 칭송받던 현종. 그는 35세 연하의 양귀비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했다. 아들의 비빈이었던 그녀를 끝내 포기 못한 현종은 마침내 며느리 양귀비를 이곳 화청지로 불렀다. 연정(戀情)이 부정(父情)의 도리를 누른 것이다. 이 때가 743년. 황명에 의해 그녀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서 두 사람의 ‘역사적인 사랑’은 시작됐다. 현종은 그녀를 ‘말하는 꽃’으로 표현했다. 그렇듯 그는 한 순간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토록 열정을 쏟던 정치도 갈수록 시큰둥해했다. 마치 현종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황제가 된 듯 했다.

<사진설명>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풍운의 여인 양귀비.

그러나 세상은 이들의 사랑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양귀비의 친척들이 고관대작을 차지하고 세금을 포탈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세도가들도 그들과 대립했다. 마침내 현종의 양아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의 회오리는 들불 번지듯 급속히 퍼져갔다. 뤄양(洛陽)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고 장안도 곧 무너질 판이었다. 현종과 양귀비는 시안을 탈출해야 했다. 마외역(馬嵬驛)에 도착했을 무렵 양 씨 일가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을 죽였다. 성난 병사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한 것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현종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이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양귀비는 배꽃 화사한 나무에 목을 맸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훗날 난이 잦아든 후 장안성으로 향하던 현종은 이곳에 들러 오랫동안 통곡을 했다. 또 그는 남은 생애를 양귀비의 그림을 보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꽤나 로맨티스트였는가 보다.


화청지의 대중온천목욕탕 ‘눈길’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까 사진이나 한 장 찍어요, 스님?”
“싫어요, 저게 뭐예요, 웃통을 다 벗고.”

양귀비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자는 일행에게 한 스님이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젓는다.
사실 양귀비는 야들야들한 미인형은 아니다. 그녀는 719년 쓰촨(泗川)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부에서는 서역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빠 양국충이 서역의 춤에 능했고, 역사서에서도 그녀를 중국적이기보다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歌舞)에도 뛰어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을 볼 때 터무니없는 얘기 같지만은 않다.

20∼30분 지나니 어둠이 깊이 내려 더 이상 구경은 어려울 듯 쉽다. 우리는 화청지를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떠나간 공터에는 가로등불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부처님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랑하면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면 만나서 괴롭기 때문이란다. 이 말을 현종이 새겨들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겠지만 중생심이 어디 그런가. 정견(正見)을 갖추지 못한 중생은 어쩌면 화려함을 좇아 불길로 뛰어드는 나방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망상들과 함께 타향의 하루는 또 그렇게 어둠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산사태 만나 회족 자치구로 우회

눈을 뜨니 시계는 새벽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짐을 꾸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은 화려하지만 낯선 향내가 자못 입맛을 떨어뜨린다. 한 끼 한 끼 식사 해결하는 일이 점점 부담으로 와 닿는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현관으로 내려왔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도로가 다소 한산하다.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드넓은 관중평야가 모습을 드러낸다. 동서로 무려 400km나 뻗어있는 대평원, 장예모 감독과 공리가 주연한 ‘붉은 수수밭’의 무대이기도 하다.

<사진설명>산사태로 텐수이(天水)로 가는 길이 막혔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진다. 법문사가 있는 바오지(寶鷄)를 지나면서 산세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산들은 점점 사라지고 양옆으로 평평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협곡을 타고 우리는 빠르게 질주해 나갔다. 그렇게 2시간 정도 달렸을 때 갑자기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자오타(晁塔)라는 톨케이트에 이르자 경찰관들이 입구를 통제하고 있다. 톈수이(天水)로 가는 길이 산사태로 끊겼으니 돌아가라는 것이다. 일행들은 물론 스텝들도 당황했다. 톈수이를 거쳐 란저우로 가는 길이야 미리 사전답사를 했다지만 다른 길은 낯설 수밖에 없는 탓이다. 잠시 후 우리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운전대를 돌려 바오지로 다시 나와 닝샤후이주(寧夏回族)자치구로 향했다. 이곳은 길이 험한데다 우회하는 것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밤 12시 안에는 도착하기 힘들 것 같다. 아까 보았던 병풍 같은 산을 향해 올라갔다. 비포장도로에다 길이 협소해 대단히 위험하다. 고도계가 자꾸 높아져 1000m를 넘어섰다. 비는 다소 가늘어졌지만 바람은 외려 거세다.

사방이 온통 계단식 밭이다.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개간할 수 있었을까. 먹고 살아야 하는 힘겨운 삶의 무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까지 농사를 짓게 했으리라. 논밭들 사이로 수많은 토굴들이 보였다. 농작물을 저장하기도 하고 아직 사람이 살기도 한단다. 경제지수가 곧 행복지수는 아니겠지만 이들의 고단한 생활을 생각하니 돌을 얹은 듯 가슴이 갑갑하다.

그렇게 다시 몇 시간, 해발 1400m를 기점으로 다시 내리막길이다. 굽이진 진흙탕 길을 시속 80km 내닫았다. 차는 끊임없이 점프를 하며 요동을 치고 온몸이 들썩인다. 운전자가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바로 그때, 뒤따르던 4호차의 뒷바퀴가 진흙구덩이 속에 빠졌다. 엑설레이터를 세게 밟을수록 흙탕물은 사방으로 튀고 바퀴도 더 깊이 빠져들어 갔다. 선두차가 비좁은 길을 간신히 돌아 4호차 앞에 댔다. 진흙탕 속에서 준비해온 로프를 연결하고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여를 달렸을 때는 점심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식당이 있을리 만무한 산 속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했던가. 비록 라면에 김치 몇 조각이지만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바로 그 때 우리를 지켜보는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약 5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누구길래 이 산속에 서있는 것일까.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만 더 있으면 산으로 올라갔던 양들이 내려올 거예요.”

서른 살이라는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그는 산마을 사람이다. 매일 아침이면 10마리의 양을 이곳으로 데려와 산으로 올려 보낸 후 저녁 때 양들이 모두 내려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행여 중간에 내려온 양들을 누가 가져갈까봐 하루 종일 지키는 게 그의 일이다. 살아가는 방식도 참 다양하다. 우리가 실크로드를 달리는 내내 이 사람은 이 자리에 서있을 것이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마찬가지겠지….


15시간 험난한 주행 끝에 란저우 도착

식사를 간단히 마친 우리는 다시 달렸다. 내리막을 한참 거쳐 다시 해발 2000m에 오르니 거대한 평원이 나타난다. 놀랍다, 한라산보다 높은 곳에 이런 평야가 있다니! 오전에 협곡에서 올려다본 병풍 같던 것은 산이 아니라 고원지대였던 것이다. 끝없이 뻗어있는 길 양옆으로 포플러 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간혹 길옆으로 작은 도회지들이 나오고 한국의 시골장과 비슷한 시장풍경도 눈에 뜨인다. 저녁 6시께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거대한 설산이 우뚝 서 있다. 저 산을 넘어야 란저우로 갈 수 있다.

<사진설명>30세의 이 젊은이(?)는 매일 이곳에 서서 하루종일 양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다.

해는 지고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힘을 내 차를 몰았다. 산을 오를수록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더니 흰 눈이 모습을 드러낸다. 후여후여 차를 몰아 약 2600m정상을 막 넘어서자 설상가상으로 전방에 교통사고가 났단다. 대형트럭이 전복된 것이다. 수많은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길에서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험을 무릎 쓰고 갓길 얌체운전을 시도했다. 흰색 번호판의 이국 차량들 행렬 때문인지 중국인 운전자들도 이해해 주는 눈치다. 그렇게 험한 산길을 몇 시간 내려와서야 비로소 평지가 나타났다. 밤도 차의 속력만큼이나 빠르게 깊어가더니 벌써 자정을 훌쩍 넘어섰다. 한참을 내달려 마침내 멀리 란저우의 화려한 불빛이 아련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란저우(蘭州)는 그윽한 난향이 배어있는 지명과 달리 땀과 빗물의 험난한 주행[亂走]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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