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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 [중]

기자명 김재성

위파사나 수행법 세계화 ‘일등공신’

1938년, 마하시 사야도는 잠시 몰민을 떠나 고향인 세익쿤(Seikkhun)으로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촌형제 3명을 위시로 해서 50명의 수행자에게 7개월 동안 위파사나를 가르치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위파사나 지혜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였다. 교육을 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다시 몰민으로 돌아온 마하시 사야도는 교학뿐만 아니라 수행도 지도하게 되었다. 교학과 수행의 두 가지 법을 결합한 것이다.

<사진설명>1954년부터 1956년까지 미얀마에서 개최된 상좌불교 제6차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결집을 이끌어가는 질문자 역할을 담당했다.

선교 겸비한 선지식

1941년, 처음으로 실시된 법사시험에 통과한 마하시 사야도는 위파사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위파사나 수행을 처음 지도했던 고향 마을 세이쿤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해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화가 미얀마에 퍼지게 된 때이며, 전쟁 기간 미얀마는 많은 고통에 빠지게 되었고, 불교 활동은 중단되었다. 다행스럽게 세이쿤 마을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보지 않은 마을 가운데 하나여서 마하시 사야도는 위파사나와 법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 수행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은 재가자들의 요청에 의해 마하시 사야도는 위파사나 수행법에 대한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7개월 만에 팔리 경전, 주석서, 복주에 대한 자세한 언급과 함께 실제적인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 좬위파사나 수행법좭 2권을 1944년에 탈고한다. 2권에서 실제적인 수행법을 다루고 있는 제 5장이 영어로 번역되어 위파사나 수행을 외국에 소개하게 되었다.

1945년에 전쟁은 끝났고, 마하시 사야도는 몰민과 세이쿤을 오고 가며 교학과 수행을 지도하였다. 세이쿤으로 돌아온 마하시 사야도는 좬대념처경좭에 대한 미얀마어 해설서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경전 구절에 대한 자세한 해설과 함께 위파사나 수행 과정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1947년 11월 13일, 랑군에 불교 협회를 세우고 초대회장이 된 우 트윈(Sir U Thwin)의 마음에는 교학은 물론 수행법을 진흥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미얀마의 상황에서 불법을 진흥하기 위한 일을 생각할 때, 교학을 진흥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행을 지도할만한 스승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협회에서 수행을 지도할 스승을 찾으면서 초대 수상인 우 누(U Nu, 1907∼1995, 1948∼62 재임)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우 트윈은 1947년에 북부 미얀마를 방문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명성을 접하였고,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5일간 마하시 사야도의 지도하에 30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위파사나 수행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마하시 사야도가 자신이 세운 랑군의 수행센터를 이끌어줄 적임자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으며, 랑군으로 돌아와서 붓다 사사나 누가하 협회의 운영위원들에게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우 트윈의 의사는 운영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랑군센터 25명으로 시작해 60만

1949년, 마하시 사야도는 수웨보(Shwebo)마을에서 교학과 수행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우 누 수상이 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마하시 사야도에게 랑군의 수행센터에 오셔서 수행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마하시 사야도는 아직 건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랑군의 수행센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마하시 사야도가 수행지도를 시작하자 이 수행센터는 마하시 수행센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1949년 12월 19일 시작된 마하시 수행센터에서의 첫 집중수행에는 25명이 참가했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에 수행자들은 자신이 수행 도중에 경험한 일들을 매일 마하시 사야도에게 보고하여 점검을 받아야 했다. 매일 수행자들을 점검하는 지도방법은 마하시 사야도에 의해서 채택되었으며, 수행자를 지도하는데 가장 만족스러운 방식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지도법 때문에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은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마하시 수행센터에서 수행한 수행자들 가운데 자질 있는 제자들에 의해 위파사나의 씨앗은 미얀마 각지에 뿌려지게 되었고, 마하시 사야도는 이들이 수행을 잘 지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지도를 해주었다. 따라서 마하시 사야도의 도움으로 미얀마 각지에서 300여 곳의 마하시 수행센터 분원이 생겼으며, 태국과 스리랑카 등지에도 마하시 스님의 직제자들이 지도하는 분원이 생겼다.


유럽-미국에도 위파사나 개척

마하시 센터 설립 23주년이 되던 1973년, 랑군의 센터에서 수행한 수행자는 60만명에 이르렀고, 태국에서, 스리랑카, 캄보디아, 인도 등지에서 수행한 수행자의 수를 모두 합하면, 70만명에 이르렀다. 이후, 마하시 사야도는 태국, 스리랑카, 캄보디아,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유럽, 미국 등지에 위파사나를 전하였으며, 1938년에 처음 위파사나를 지도한 이래 1982년 8월 14일,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실 때까지, 44년간 위파사나 지도는 물론 저술과 법문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남기신 위파사나 수행의 대선지식이다.

마하시 사야도 생존시부터 많은 제자들이 마하시 센터와 분원에서 수행자들을 지도해 왔으며,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우 빤디따 스님, 우 실라난다 스님, 우 자나카 스님, 우 쿤달라 스님, 우 자띨라 스님과 같은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들에 의해서 수행 지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설명>마하시 사야도는 평소 제자들에게 교학과 수행덕목을 강조했다.

위파사나 수행지도자인 마하시 스님은 교학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1954년에서 1956년까지 미얀마에서 개최된 상좌불교 제 6차 결집에서 질문자의 역할을 맡는다. 결집을 이끌어 나가는 질문자는 제 1차 결집 때 마하가섭 존자가 담당했던 역할이었다.

미얀마에서는 마하시 스님을 본보기로 해서 마하시 수행법의 수행지도자들은 교학과 수행의 덕목을 기본적으로 겸비하고 있다. 이는 충실한 상좌불교 교학에 바탕을 둔 수행법의 실천이라는 미얀마 불교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 호에는 마하시 스님의 수행법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본다.


김재성/경전연구소 소장

metta4u@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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