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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주취안(酒泉)으로 가는 길

기자명 이재형

전쟁으로 사라진 병사들의 넋 황사되어 날리고…

<사진설명>란저우를 벗어나면 삭막한 대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길은 4세기 초 법현 스님이 구법의 길을 걸으며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오직 죽은 사람의 오래된 뼈만이 길 가는 이의 표지가 될 뿐이구나."라고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도 날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어제 15시간의 강행군 끝에 우리가 란저우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가까워서였다.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 마치 꿈결처럼 아련하다. 찬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란저우가 어둠을 밀어내고 거대한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란저우(蘭州)는 서북부 최대의 공업도시로 300여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인구 수십만의 변방도시였으나 서부대개발에 힘입어 급성장하고 있다. 란저우는 예로부터 간쑤성, 칭하이성, 신장성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런만큼 이곳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한족문화가, 서쪽으로는 소수민족의 문화적 특색이 갈리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쌍용자동차 팀은 한국에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며 로비에서 분주하다. 결국 30분 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메일을 보내기는커녕 사용료 260위엔,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만 날렸다. 사실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몇몇 국제도시를 제외한 여느 지역은 아직까지 인터넷은커녕 국제전화를 이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호텔들도 겉은 화려하지만 안은 우리나라 여관수준도 못돼는 경우가 많다. 난방이 제대로 안돼 추위에 떨어야 할 때가 많고 심지어 갑작스런 정전으로 촛불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도 있으니 말이다.

<사진설명>돈황 막고굴 323굴의 장건서역도.


많은 지역명에 흉노족 흔적 여전

오전 7시 30분, 우리는 차창에 내린 서리를 걷어내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오늘 목표는 주취안(酒泉), 735km의 만만치 않은 거리다. 시멘트에 굴곡이 심한 도로지만 아침부터 많은 차량들로 붐빈다. 이리저리 곡예를 하듯 빠져나오니 란저우를 가로지르는 황허(黃河)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조금 가니 멀리 오췐(五泉)공원이 보인다. 고대 한족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흉노에 대한 적개심이 배어 있는 이름이다. 한나라의 명장인 곽거병은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물이 없어 병사들이 잇따라 쓰러지자 곽거병이 산위로 말을 몰아 채찍을 다섯 번 내리치자 다섯 개의 샘물이 솟았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실제 서부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흉노와 관련된 지명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주취안(酒泉)도 흉노를 정벌한 곽거병이 축하주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자 샘에서 술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또 오후에 지나가게 될 장예(張掖)도 나라의 팔과 겨드랑이(掖)를 벌려(張) 흉노의 팔을 분지르고 서역으로 가는 길을 트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흉노가 한족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흉노를 막기 위해서였다. 한나라 고조 때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10만 대군을 잃을 정도로 흉노는 대단히 막강했다. 이후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고 수많은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이러한 한족의 열세를 반전시킨 것이 중국인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무제 때다. 그리고 본격적인 실크로드의 개막도 그에 의해 이뤄지게 된다.

한무제는 만리장성을 넘나들며 흉노와 대접전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흉노의 포로를 잡게 되고 그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듣게 된다. 수십 년 전 흉노에 쫓겨 서쪽으로 달아난 월지국에 대한 얘기였다. 이들은 흉노에게 왕과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해 흉노에 대한 원한이 대단히 깊었고, 이들과 협력할 경우 흉노족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제는 월지국과 힘을 합쳐 흉노를 아주 근절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월지국에 갈 사람을 모집했는데 여기에서 선발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이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하인 감보(甘父)를 비롯해 부하 100명을 데리고 월지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길은 먹고 마실 것도 얻기 힘든데다 흉노의 땅을 가로질러야 하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처음 우려했던 대로 천산북로를 가로지르던 중 그는 흉노에 붙잡히고 만다. 그러나 당시 흉노는 죽이기보다 자기편으로 만들어 이용하려 했다. 이런 까닭에 집도 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다. 장건도 고분고분 따랐다.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장건은 자식도 낳게 되고, 흉노까지도 장건이 완전한 흉노인이 됐다고 흡족해했다. 그러나 장건은 한 시도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어느날 장건은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흉노족이 뒤쫓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게 된다. 이래저래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장건은 마침내 월지국에 도착했고 한무제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지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제 간신히 나라가 안정됐는데 굳이 흉노를 건드려 나라를 다시 도탄에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낙담한 장건은 한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천산남로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다시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번에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흉노 내부의 정권다툼으로 혼란스러워졌고 이 때를 이용해 탈출을 감행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장건은 13년 만에 지금의 시안으로 돌아왔다. 같이 갔던 일행들은 다 죽고 그의 곁에는 오직 충직한 부하 감보만이 있었다.


장건에 의해 실크로드 시대 개막

비록 장건이 외교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의 끝은 절벽이라고 믿던 시대에 장건이 들려준 얘기는 ‘쇼킹’했다. 장건의 여행담을 들은 한무제는 이를 토대로 대대적인 흉노토벌에 나서고 마침내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시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화려한 실크로드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흉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 교역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들에게 한족의 북방정책은 생존의 위협과 직결됐다. 당연히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말고삐를 실크로드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실크로드는 국가가 흥하냐 망하냐를 가름하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곳에서 그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사라져 갔을까? 흩날리는 황사의 먼지가 마치 이름없이 사라져간 병사들의 넋만 같다.

며칠 동안 줄곧 빗속을 달렸던 것과는 달리 날씨가 그런대로 화창하다. 란저우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던 우리는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구부러진 길을 오르고 올라 마오마오산(毛毛山)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45m의 준령을 넘을 때다. 우리 일행간의 연락을 위해 설치해 놓은 무전기에서 혼선이 일어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중국어나 소수민족의 언어가 아니라 익숙한 한국어다.


在中 한국인 노동자의 ‘슬픔’

“돈이 있어야 나가지. 일도 안 되고 살맛이 안나.…먹었어, 라면 하나면 하루는 살 수 있어. 더 이상 신세지기도 싫어, 그냥 집에 있을래….”

40대 남자가 동료와 통화하고 있는 듯 했다. 중국에 돈 벌러 와서 일도 잘 안돼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돈도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고, 어떻게 이 이역만리 낯선 땅까지 왔을까. 그 사람의 고통에 마음이 아려온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황사 때문인지 하늘이 뿌옇다. 그 때문일까, 마음까지 황사로 뒤덮인 듯 갑갑하다.

<사진설명>길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젊은 남자. 과일의 무게를 재는 표정이 진지하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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