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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 불교 발전 촉매제"

기자명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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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 불교 연구의 중요성은?

달마에 대한 분석을 의미하는 아비달마 (abhidharma)는 본래 초기 경전에 대한 주석 전통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불전이 구전을 통해 전승되던 시기에 암송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논모 (matrka)의 형식이 점차 이론화되고 조직화됨으로써 수트라 (sutra)와는 다른 아비달마라는 제명의 문헌군을 형성하게 되지요. 아비달마의 논사들은 치열한 논변을 통해 불설의 주요 논점에 개념적 엄밀함을 부여해갑니다. 아함은 대기설법이어서(abhiprayika) 상황논리에 가깝지만 아비달마는 정확한 개념설정에 근거했기 (laksanika) 때문에 궁극의 논리라는 자신감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비달마의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없이는 초기불전의 이해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지요.

<사진설명>장니 교수의 명작 『아비달마 디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논변을 통한 개념의 규정 작업이라는 아비달마적 방법론은 인도 불교가 전승 (agama) 의 권위를 넘어 논리 (nyaya) 와 대론 (vada)의 시대로 이행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불교가 수행도 (marga)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철학체계 (darsana)로 재편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초기 불교 본래의 실존적인 문제의식이나 수행을 중시하는 분위기로부터 멀어지는 감은 있지만, 그것은 싫든 좋든 인도대륙의 승단이 쟁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한 불가피한 길이었습니다. 아비달마로부터의 반발이든 그 전통의 계승 발전이든 그 이후 전개되는 중관이나 유식불교는 아비달마 교의학의 개념 구도를 간과하고는 생각할 수 없지요. 용수, 월칭, 세친, 안혜 등 중관이나 유식 논사들 중 그 누구도 아비달마 교리학에 대한 기초를 결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비달마는 그 자체로도 인도 불교 사상사 최초의 포괄적인 시스템 구축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반면교사가 되어 후대 불교 철학의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혹자는 교수님을 불교도라기보다는 자이나교도라고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한 좀 짓궂은 질문이지만 개인적으로 불교와 자이나교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태생적으로 자이나교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 마음속에 불심을 키우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하진 않습니다. 제 연구실 앞에 붙여 둔 “부처에 대해 명상하라” (Think on the Buddha)는 문구는 저의 이러한 태도를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고대 인도의 슈라마나 전통을 모태로 태어난 동일한 자유정신의 두 갈래 일뿐입니다. 인도의 종교라는 것은 거대한 바니안 트리와도 같아서 줄기로부터 무수히 많은 가지를 치고 나오지만 어떤 가지도 원숭이나, 새들의 이동이나 서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상호 유기적으로 얽히고 섞이며 큰 흐름을 형성해 갈 뿐이죠.

학문적으로 보아도 불교나 자이나교 모두 위대한 사상가를 수없이 배출한 사문전통의 양대 산맥입니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생존의 전략을 배우며 인도사상의 역동적인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예컨대, 종조인 마하비라의 사후, 사분오열하는 자이나교 교단을 목격한 고타마 붓다의 초기 교단은 황급히 경전을 결집하고 승단의 결속을 다짐합니다. 반면에, 5세기경의 자이나 논서 『드바다샤람 나야짜끄람』(Dvadasaram Nayacakram)에서는 외도 비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수반두나 디그나가 계열의 유식설을 극복하려하지만 도리어 한수 배우는 꼴이 됩니다.
상인과 대상 (隊商) 계층이라는 동일한 후원그룹을 둔 라이벌 관계로서 두 종교는 사회경제적 배경에서는 따라서 상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돋보이지요. 하지만 엘리트 그룹은 자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대론에 참여하며 정신적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들의 문서만이 남겨진 우리에게는 차이점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것은 자이나교는 무슬림의 침입 이후에도 소수종교로서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불교는 문명의 외피를 바꿔 입음으로써 오히려 세계종교로 발돋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불교사상의 유연함이나 포용력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며 자이나교에는 불교의 대승에 해당하는 버전이 없다는 점도 이를 시사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불교학을 하시고 싶으십니까?

그건 저의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지요. 제가 저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통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평상시 제가 쌓은 업의 공덕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저의 최후의 의식 즉, 결생식 (pratisandhivijnana) 이 어떤 생각을 최후의 대상으로 파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지요. 저는 자이나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나 몸에 베인 채식주의와 비폭력의 생활을 영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만 평생에 걸친 불전의 연구를 통해 축적된 명언종자의 추세가 저의 의식을 어디로 인도할 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하지만 내생에서는 소위 외도 (tirthakara)로서가 아니라 불교와 좀 더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남섬부주의 동쪽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현생에서 자이나교와의 인연은 불교와 만나기 위한 인도인으로서의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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