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암 스님 [상]

기자명 윤청광

“천고에 자취 감춘 鶴이 될지언정…”

방한암(方漢岩) 큰 스님은 조선조 말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때 우연히 금강산 구경길에 나섰다가 장안사(長安寺) 행름노사를 만나 삭발 출가하였다.

24세 때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 경허대선사를 청암사에서 만나 『금강경』을 배우던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개안(開眼)의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통도사를 거쳐 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 있는 우두암에서 홀로 참선수행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사진설명>한암 스님의 생전 모습.


부엌에서 불 지피다/홀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인연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젖는 일 없다 하리.

이 때 한암 스님의 세속 나이는 35세.


“한암 아니면 누구와 지음(知音) 되랴”

한암 스님이 해인사에서 머물고 계실 때, 스승이신 경허 선사께서 정처없는 만행길에 올라 해인사에 오셨다. 경허 선사는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 해인사를 떠나면서 한암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글 한 편과 시(詩) 한 수를 지어 한암에게 전했다.

“나는 천성이 화광동진을 좋아하고 더불어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내다 우연히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선행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인양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서게 되니, 아침 저녁의 연운과 산해(山海)의 멀고 가까움이 진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차 있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詩)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못한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렵지 않지만
뜬 목숨 흩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이 간절한 스승의 글과 시를 받아 본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스승께 바쳤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지나갔건만
어찌하여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없을까.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 달
뜬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오.


그리고 한암 스님은 스승 경허 선사와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감히 짐작이나 했으랴.


“잿물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한암 스님께서 한강 건너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었다.

한번은 한암 스님께서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참배길에 오르셨는데, 이 때 시봉을 들고 있던 수좌는 성관이었다. 지금은 드넓은 다리가 두 곳에 놓여서 강화도 가는 길이 편하지만 당시에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지기 전이라 배를 타고 건너다닐 때였다. 우선 김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수십리길을 걷고 걸어서 길상면 전등사까지 가자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버렸다. 게다가 비까지 억수로 퍼부었다.

<사진설명>한암 스님이 주석했던 월정사.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색하기 그지없는 부잣집이었다. 그 부잣집 주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스님께 빈정거렸다.

“스님들은 탁발을 나오기만 하면, 보시하라, 나누어 주어라, 그러시던데, 재산이 좀 있다고 해서 허펑허펑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안 쓰고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게 옳겠습니까? 어디 한 번 대답을 해보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잣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주인 어른께서는 오른손을 한 번 펴보시지요.”
“손을 펴라니, 이렇게 손가락을 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손가락을 쫙 펴셨는데, 그 손가락을 오무리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편 손을 오무리지 못하면 불구입지요.”
“그럼 이번에는 주먹을 한 번 쥐어보시지요.”
“이, 이렇게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주먹을 꼭 쥐셨는데, 이 손을 펴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입니까, 아닙니까?”
“아, 그야 주먹을 펴지 못하면 그것도 불구입지요.”
“재물도 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재물도... 그와 같다니요?”
“재물도 덮어놓고 허펑허펑 허비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재물을 덮어놓고 움켜 쥐고만 있으면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닙니다. 손을 펼 때 펴고, 오무릴 때 오무릴 수 있어야 정상이듯이, 재물도 또한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한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난 그 부잣집 주인은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었다.

이 때 강화도 전등사와 보문사를 참배하고 봉은사로 돌아오신 한암 스님은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홀연 봉은사를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동구밖 출입을 끊어버리셨다. 이 때 봉은사를 떠나시면서 저 유명한 한 말씀을 남기셨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 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윤청광/본지 논설위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