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⑩ 아! 둔황

기자명 이재형

서역에선 별이 지평선에서 뜨고 지더라

<사진설명>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멀리 치롄산맥 아래 긴 굉음을 울리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화물열차가 보인다.

자위관을 뒤로 하고 차는 둔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누런 사막 위에 길게 뻗은 도로가 마치 검고 굵은 한 마리 뱀 같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 있는 구름은 어린 시절 고향 산천에서 보았던 하얀 눈마냥 뽀송뽀송해 보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때다. 멀리 긴 굉음과 함께 아스팔트보다 짙은 육중한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량, 두량, 세량…. 끝이 안 보이는 게 족히 오십량은 됨직하다. 땅 덩어리가 크다보니 화물열차도 저렇게 긴 걸까. 고비사막을 가로지르는 열차가 중국의 거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사실 중국은 철도의 나라다. 철로는 서쪽의 티베트자치구와 신장성(新疆省)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또 시속 170km로 달리는 터콰이(特快)에서부터 만만디(慢慢的, 천천히)의 상징으로 시속 60km 이상 속력을 못내는 커(客)까지 천차만별이다. 가격도 비싼 것은 비행기 값을 육박한다. 14억 인구가 사는 너른 땅, 고향이 먼 사람들은 열흘 이상 가야한다니 하루생활권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사진설명>둔황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

건조한 기후 탓인지 입술이 마르다 못해 버석거린다. 선두차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주는 쿠스코의 ‘아프리맥’이 이곳 배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다시 달렸다. 오후 4시쯤 됐을까, 멀리 사막 한 가운데 작은 점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커다란 나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둔황이다. 텔레비전과 책에서나 보았던 둔황이 마침내 우리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인구 10만의 깔끔한 도시

거친 사막이 곱게 품은 둔황. 이곳은 실크로드의 여행자들의 반드시 거쳐 가는 오아시스 도시다. 현장 스님이 이 곳을 지나 인도로 갔고, 혜초 스님은 이 길을 거쳐 장안에 들어갔다. 그 분들의 발자취야 거센 모래바람에 사라진지 오래지만 둔황은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전한 통로로, 또 그 자체로서 찬연한 불교문화의 절정을 일궈낸 불교성지로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사진설명>한국인의 방문을 환영한다며 둔황 숙소측에서 환영행사를 열고 있다.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실크로드 요충지다. 그런 탓에 기원전 2세기 한무제 이후 천수백년 간 이곳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둔황의 전성기는 당나라 때였다. 비단길의 중간기지로 자리 잡으면서 무역과 문화교류의 중심지로 부각됐던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게 만고의 진리. 당이 쇠퇴한 뒤로는 위구르, 서하, 투르판, 티베트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둔황은 그 명맥을 근근이 이어왔다.

실크로드의 영광이 사라지면서 둔황도 옛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뒤 약 1000년간 역사의 외면을 받아왔다. 그런 둔황이 역사의 무대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은 20세기 초 막고굴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세계 사상사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진귀한 문서와 보물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작은 오아시스로 전락됐던 둔황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박물관서 수많은 불교유적 관람

둔황 초입에 접어드니 짐칸에 하얀 목화를 가득 실은 삼륜차들이 종종 눈에 띈다. 고온의 건조한 기후에 적절한 수분은 이곳 둔황을 목화도시로 성장토록 했다. 양 길가에 하늘로 길게 뻗은 포플러 나무들이 마치 병사들이 사열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 가로수를 20분쯤 지나자 우리가 머무를 숙소가 보였다. 여느 호텔들과는 달리 고졸미와 운치를 잘 살린 게 마치 공원 같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직원인 듯한 30여 명의 남녀들이 숙소 입구에서 환영행사를 열고 있다. 허리에 긴 연두색 천을 묶은 그들은 북소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갑작스런 광경에 당혹감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반갑고 재밌다.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시내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피곤함도 낯선 도시가 주는 설레임을 누를 수는 없는가 보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올라탔다. 한적한 도로를 다시 10여분 달리니 아담한 시내가 보인다. 둔황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한산하고 거리도 깨끗하다. 비파를 켜는 선녀상이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게 이곳이 둔황이라는 실감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우리가 처음 들른 곳은 둔황박물관.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니 수많은 유물들이 진열돼 있다. 이곳 박물관은 197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소장 유물만도 4000여 점이 넘는다. 청동기시대부터 한, 당, 북위, 티베트, 청의 유물들이 전시실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다. 종류도 고문서에서부터 불상, 벽돌, 불화, 군사장비, 생활물품 등 다양하다.

장경동에서 발견됐다는 그 유명한 육조단경도 눈에 띈다. 경주 천마총에서 보았던 날개 달린 말도 있고 두 뼘 가량 크기의 석탑에 부처님을 정성껏아로 새긴 성보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나라 때의 유물인 10센티 크기의 귀두(鬼頭)다. ‘귀신머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무섭기는커녕 귀여운 것이 꼭 우리나라의 귀면와를 닮았다.

또 갖가지 모습을 한 30센티 크기의 도용(陶俑)들은 수천 년 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박물관 구석구석을 관람했지만 숙제를 제대로 못한 아이처럼 여전히 아쉬움이 크다.


황홀한 둔황의 밤 하늘

박물관을 뒤로 하고 우리는 길 건너 시장으로 향했다. 저녁때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득하다. 100미터 가량 이어진 상가들과 노점상들은 갖가지 물건들을 펼쳐보고 사람들과 흥정하고 있다. 양(羊) 꼬치나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도 있다. 누군가가 “여기서 제값주고 사면 바보”라고 했듯이 처음에 불렀던 가격이 나중에는 10분의 1로 떨어지기 일쑤다. 바가지를 씌우려는 그들이 얄밉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깎고 또 깎으려는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사진설명>4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둔황박물관.

해가 지고도 한참을 구경하다 우리는 택시에 나눠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들과 별구경에 나섰다. 목화밭 고랑을 따라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헉!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밤하늘에 빽빽하다.

금방이라도 쨍 소리를 내며 쏟아질 듯 한 맑은 별들. 언젠가 지리산 천왕봉에서 보았던 별들만큼이나 곱고 아름답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은하수와 긴 꼬리에 까만 허공을 가로지르는 별똥별들. 금방이라도 어린왕자의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 광경은 대자연이 연출하는 한편의 대파노라마다.

태초의 신비에 온몸으로 마주하고 선 느낌. 서역의 밤은 눈물처럼 고운 별들과 함께 그렇게 깊이 젖어들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이 사람 만나면 조심하세요

둔황 택시 모모 씨

밤늦게 시장에서 돌아올 때다. 숙소가 외곽에 있는 탓에 우리는 택시를 탔다. 10위엔, 우리나라 돈으로 1500원이면 간단다.

30대 초반의 그 남자는 이곳에서 11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택시가 수십 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족히 1000대는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택시기사는 인기직종이어서 그들과 결혼하려는 처녀들이 줄을 섰다고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인구도 80년대까지는 2~3만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주변인구까지 치면 10만 정도가 둔황에 산다고 했다.

10분 정도 달려 택시는 우리 숙소에 닿았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려 할 때다. 그 젊은 기사가 갑자기 15위엔을 내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함께 탄 일행들이 10위엔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냐며 항의했지만 막무가내다. 5위엔을 더 내지 않으면 못 내린다고 으름장이다. 참 배포도 좋은 녀석이다. 어이가 없고 실랑이도 더 이상 하기 싫어 우리는 5위엔을 더 주고 내렸다.

둔황 가시는 분들. 이 사람을 보면 조심하시고, 만약 탔다면 내릴 때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