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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광덕 스님 (1927∼1999)

기자명 권오영

대각사상 대중화 이끌어

1999년 2월 27일 입적

광덕 스님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용성, 동산, 소천 스님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대각 사상을 현실적으로 대중화 시켜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평생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으며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해 생활불교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한국대학 재학시절 한관섭 선생을 만나면서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 선방에서 처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처사의 신분으로 범어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광덕 스님은 1952년 당대 최고의 선사로 추앙 받던 동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는다. 이후 스님은 소천 선사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회’에 참가해 구국구세 운동에 나섰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그는 다시 범어사 열반당으로 돌아와 동산 스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반야바라밀 실천운동

위도 잘라내고 폐도 잘라낸 몸으로 용맹정진을 거듭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위법망구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광덕 스님의 정신력 앞에 병마도 두 손을 들고 말한다.

나이 서른이 되던 해 구족계를 받고 정진의 끈을 놓지 않았던 광덕 스님은 ‘꿈도 생각도 아닐 때 나는 무엇이냐’는 화두 참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는 이후 자신이 깨달은 반야바라밀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거리 포교 일선에 나섰다.


30여권 불서 저술 남겨

그는 1954년 부산 좌천동 한 가정집에서 열었던 사랑방 법회를 시작으로 불광법회를 개설해 부처님 본연의 근본불교를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또 일생동안 30여 권의 불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기도 했으며 각종 찬불가를 작사해 현대 불교 음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종단 총무부장, 총무원장 직무대행까지 역임하면서 종단 행정의 현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사진설명>1971년 청담 스님의 열반으로 총무원장 대행을 맡았던 광덕 스님.(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평생을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를 구현하려 노력했던 광덕 스님은 1999년 2월 27일 문도들에게 ‘이제 다시 시작하라. 다시 출발하라. 불광은 이제부터 시작이니…’라는 당부를 남겨둔 채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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