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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둔황 막고굴-上

기자명 이재형

모래바람 속에 활짝 핀 천년 불교미술의 진수

<사진설명>세계 최대의 호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 막고굴. 백양나무가 기도하듯 경건하게 서 있다.

헤매고 돌아다닌 거/나를 찾아/가고 또 간 길.

모래산 나즉이 누웠고/월아천 눈썹 눈물이 나/천수천안 백양나무 앞에 서 있었다.

흙벽 소담한 돈황의 언덕,/흙산을 뚫으며/부처님 찾아 관세음보살 외치던/수천 수만 염원의 손,/그 세월의 벽화를 만나며/옛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황량한 흙먼지,/오래지 않아 무너질 흙굴,/가도 가도 자갈사막 이어지던/천산의 만년설 흘러내린 곳에/“기다리면 가득하리라”/초록 물빛 산에 잠기고 있었다.

- 정영자의 ‘막고굴의 서원’ 中

<사진설명>272굴 사유보살상.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118호)과 대단히 비슷하다.

하루 종일 차에서 지내다보니 온 몸에 피로가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는 듯하다. 졸린 눈을 비벼 뜨고 세수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실크로드의 꽃 둔황 막고굴(莫高堀)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설레다 못해 두근거린다.

막고굴은 둔황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지점에 있어 차로 30분이면 간다고 했다. 드디어 출발, 차가 아스팔트를 밀어내며 힘차게 달린다. 사막 곳곳에 돋아난 낙타풀이 황량하게 널려 있다. 원래 이 풀은 ‘경단초’ ‘소소초’라고 하는데 단단하고 가시가 많은 이 풀을 낙타들이 잘 먹는다고 ‘낙타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막에 익숙한 낙타라도 이 풀을 먹으면 그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피로 입이 빨갛게 물든다고 한다. 간신이 생명을 지탱하는 풀이나 그 가시넝쿨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낙타나 삶이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햇볕은 따갑고 바람은 거세다. 거친 모래밭이 그치고 가로수 우거진 도로가 나오는가 싶더니 멀리 백양나무 사이로 막고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50여 미터 높이의 언덕에 수많은 석굴들이 들어서 있고 그 아래는 얕은 강이 흐르고 있다.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백양나무들은 마치 기도를 드리는 듯 경건해 보인다. 그동안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고 머물다 사라졌을까.


벽화 45000㎡-세계 최대 화랑

전설에 의하면 366년 낙준(樂樽)이라는 스님이 나무 지팡이를 짚고 산웨이(三危山)산에서 내려오는데 멀리 밍사산(明沙山) 자락에 황금빛이 보였다고 한다.

이것을 본 스님은 상서로운 곳이라 하여 여기에 굴을 파고 수행도량으로 삼은 것이 막고굴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000여 년간 수많은 스님들과 석공, 화가, 시주자들에 의해 굴이 속속 생겨났다. 이들은 굴을 판 후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강바닥에서 채취한 진흙을 이겨 불상의 형태를 만들었다. 거기에 다시 고운 진흙을 발라 불상을 완성시키고 다양한 색채나 금박을 입히기도 했다. 지금까지 굴로 밝혀진 것이 모두 1000여 개, 이 중 벽화나 불상이 남아 있는 곳만 해도 492개에 이른다. 뿐만 아니다. 불상이 2500여 개나 되고 벽화는 총면적 4만5000㎡로 만약 현존하는 벽화를 떼어내 일렬로 이어 붙인다면 54km에 이른다고 한다. 막고굴은 사막이 위에 일궈낸 불교문화의 진수로실로 세계 최대의 미술관이자 역사박물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설명>기원전 4세기 중엽 낙준 스님에 의해 시작된 막고굴은 이후 1000여년간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 찬란한 불교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492개 굴에 불상 2500여개

우리는 한국 돈으로 1만5000원씩 하는 입장료를 끊고 ‘석실보장(石室寶藏)’이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 비슷한 누각을 지나갔다. 막고굴 앞에서 유일한 한국관광객 가이드라는 한족인 리신(李新)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간쑤성(甘肅省) 서북사범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둔황석굴에 대해 20여 년간 연구한 베테랑 가이드다. 한국어 발음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막고굴에 대해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자란다.

<사진설명>45굴 가섭존자상. 온화한 아난존자상과는 달리 다소 완고한 모습이다.

그를 따라 맨 처음 찾은 곳이 17호굴이다. 이 굴은 16호 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사실상 둔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귀중문서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역사의 베일에 감춰져 있던 이 굴이 발견된 것은 지난 19세기말 왕도사라는 인물에 의해서다. 우연히 벽 뒤에 굴이 있는 것을 알고 벽을 뜯어보니 그 안에 한문을 비롯해 팔리어, 범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으로 쓰인 4만여 점의 고문서들이 가득했다. 그 내용도 경전과 불화를 비롯해 호적문서, 계약문서, 악보 등 당시의 불교사상과 문화, 생활상들을 생생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그 유명한 혜초 스님의 좬왕오천축국전좭도 바로 이 굴에서 발견됐다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곳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이 입소문을 타고 실크로드에 퍼지면서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랭던 워너 등 서구 제국주의의 수집가들과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이곳에 와 수만 점의 귀중 문서들을 ‘연구’와 ‘조사’라는 이름으로 탈취해 갔다. 이런 까닭에 가이드 리신 씨는 이들은 “흉악한 도둑놈들”이라는 말을 연신 쏟아냈지만 어찌 보면 이로 인해 ‘둔황학’이 정착되고 불교연구가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둔황의 문서들 중 일부 귀중본이 우리나라에도 남아 있다. 오타니 탐험대가 1902년부터 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수집해 간 것 중 상당수를 1916년 조선총독부에 기증한 것이 오늘날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곳곳에 제국주의 흔적 남아

쇠창살로 막고 있는 장경동 안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정면에는 이 굴을 조성했다는 홍변(?~862) 스님이 그림 속에 단정히 앉아 있다. 언젠가 산사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인상 좋은 노스님을 빼닮은 듯하다. 특이한 것은 뒷편 벽화 왼쪽에 수건을 든 여인과 오른쪽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스님이 부채를 들고 서 있는 점이다. 또 나무에는 물병과 가방이 걸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손전등으로 입구의 안쪽을 비춰보았다. 깊은 어둠 속에 메마른 벽이 드러난다.

<사진설명>장경동의 벽화. 인상좋은 홍변 스님 뒤의 벽화가 대한히 이색적이다.

프랑스인 펠리오가 수많은 문서 아래 달랑 촛불 하나를 켜놓고 진지하게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누에트의 사진이 떠오른다.

그는 비록 순수한 학자의 입장에서 이 귀중자료들을 본국으로 가져갔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에 앞장섰다는 비판은 두고두고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문화재를 서구인들이 빼앗아갔다는 가이드의 분노도 선뜻 동감하기는 어렵다.

둔황의 불교문화는 한족뿐 아니라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신심과 땀방울이 동시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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