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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둔황 막고굴-下

기자명 이재형

천년석굴의 신비로움 佛세계가 이럴 것인가

거센 모래 바람이 그치지 않는 황량한 산웨이산(三危山). 둔황 막고굴은 그 곳 산기슭에 고요히 둥지를 틀고 있다. 4세기 중엽인 5호16국 시대부터 14세기 원나라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조성된 까닭에 막고굴의 불상과 벽화들 모습도 제각각이다.

초기의 굴, 그러니까 수나라 이전의 굴들에서는 불상의 얼굴이나 의상 등이 서역풍에 대단히 가깝다. 불교가 아직 이 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멋은 없지만 정겹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적이다. 반면 북위시대를 거쳐 당대에 이르면 정교함과 화려함은 극치를 이루고 불상과 보살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물씬 넘친다. 벽화도 초기에는 부처님의 전생 등을 표현한 것이 많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대승불교를 주제로 한 경전들이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나중에는 벽이나 천정 전체를 부처님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표현양식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설명>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합장을 하고 있는 384굴의 공양보살. 가늘게 뜬 눈과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모습은 감탄과 신비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융성했던 당대가 지나 송·원대에도 여전히 석굴은 조성되지만 그 수와 예술적인 가치는 당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492개의 굴 하나하나가 장엄한 만다라 세계를 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른 민중들의 세계관과 미학적 기준, 불교의 이해정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룩한 성소(聖所)임에는 틀림없다.

<사진설명>321굴의 쌍비천상.


각 굴마다 만다라 세계 펼쳐져

16·17굴에 이어 우리가 찾은 곳은 초기의 굴에 속하는 428굴. 이 굴은 중앙에 방형의 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에 감실을 뚫어 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전형적인 석굴조성 양식으로 사람들이 이곳을 빙빙 돌며 예배토록 한 것이다. 우리는 손전등으로 구석구석 비춰보았다. 굴 지붕에는 원숭이, 사슴, 앵무새, 공작새 등 중국의 전통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옷을 입지 않은 초기 비천상도 보인다. 비천상은 석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초기 것은 다소 뚱뚱한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단히 날렵하고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입구 옆 기둥에는 조원충(曹元忠)을 비롯해 이 굴을 조성한 시주자들의 명단이 있다. 앗, 그런데 굵은 사인펜으로 쓴 한글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고민정’.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도 발현되는구만, 쯧쯧쯧.” 이것을 본 일행 중 한명이 혀를 찬다.

중국인 가이드 리신 씨는 “이런 낙서가 굴마다 종종 있다”며 “1917년 러시아혁명 때 쫓겨 내려온 일부 러시아인들이 이 굴에 살며 벽화와 불상에 붙어있는 금박을 떼가 많이 훼손됐다”고 설명한다.

<사진설명>103굴의 유마거사 모습.

428굴에 이어 찾은 곳은 당나라 때 만들어진 328굴. 늘씬한 보살상이 마치 고대 중국의 미녀가 이런 얼굴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갸름한 체구에 반들반들한 피부, 45굴의 보살상이 풍만하고 다소 요염(?)하다면 이 굴의 보살상에는 정숙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그 위 천장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봤던 너무나 익숙한 모습의 수렵도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민중들 신앙-원력의 결정체

“이 굴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는 기막힌 천왕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24년 워너라는 미국인 도둑놈이 들고 가버렸습니다.” 더듬거리는 리신 씨의 목소리에 분노가 잔뜩 묻어난다. 그는 발길을 돌리며 “올 2004년까지만 이 굴을 개방하고 내년부터는 밀봉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으로는 문화혁명 때 심하게 훼손된 453굴을 거쳐 1400년전 조성된 미륵불이 계신 249굴, 전생에 사슴왕이었던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한 257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특히 이곳에는 수영하는 네 사람의 모습이 천장벽화에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각 석굴이 주는 충격과 감동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렵다.

<사진설명>130굴의 대불. 당나라 때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26m다. 비록 96굴의 대불보다는 작지만 그 정교함과 조형미는 훨씬 뛰어나다.

“얼릉얼릉 오랑께.”어디서 배웠는지 가이드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계속 보챈다. 그를 따라 다시 찾아간 곳은 막고굴의 상징인 96굴. 7층 누각 안에는 이곳 막고굴에서 가장 큰 33m의 거대한 석굴이 위압적으로 서있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얼굴을 본 따 만든 미륵불이라는 설을 들어서인지 그리 친근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130굴의 부처님은 비록 96굴의 미륵불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26m로 장대하다. 활처럼 길게 굽은 눈썹, 우뚝 선 콧날, 두툼한 입술, 이마의 백호. 균형이 매우 잘 잡혀 있을 뿐 아니라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자비스런 얼굴을 볼 수 있다. 29년간에 걸쳐 만들었다는 이 부처님의 얼굴이 어딘지 석굴암 부처님을 닮은 듯하고 서산 마애부처님의 얼굴을 닮은 듯도 해 한참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거대한 열반상이 있는 148굴이다. 오른 팔을 머리에 대고 조용히 누워 계신 부처님. 비록 158굴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하다. 특히 벽화에는 가슴을 치거나 조용히 합장을 하고 서있거나 탄식하는 제자들이 사실적이면서도 애달프게 표현돼 있다. 그 제자들의 모습에서 큰 스승을 잃은 비통함보다 길건 짧건 부처님을 친견했을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먼저 와닿는 것은 또 하나의 중생심일까.

<사진설명>237굴에는 신라 화랑으로 추정되는 주오관을 쓴 인물이 있다(뒷편 오른쪽에서 두번 째).


漢族 가이드 “얼릉얼릉 오랑께”

이렇게 10여 곳의 굴을 돌아보니 벌써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좀 더 많은 곳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 중에서 소설가 정찬주 씨가 발견한 237굴의 조우관을 쓴 신라 화랑을 못 본 것이 못내 서운하다.

“아! 이렇게 단단한 곳에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석굴들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돌보다 단단한 신심과 원력이 있었으니까 가능했겠죠.”
다만 몇 시간이라도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다는 스님 두 분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막고굴의 불상과 벽화들은 신심 깊은 왕과 고관대작들의 적극적인 보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막고굴은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부처님에게 의지하고 희망을 찾으려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신앙과 원력의 결정체였다. 17굴 장경동에서는 ‘그대는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하나, 나는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말한다( 道生勝死, 我道死勝生)’는 1000년 전의 민요가 발견됐다.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노랫말이다. 또 같은 굴에서 발견된 ‘전아계(典兒契)’라는 문서에는 조승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남에게 6년 동안 일을 시킬 수 있도록 하는 대신 돈을 빌려 석굴 불사를 일으켰다는 내용도 보인다.

<사진설명>화려한 색채와 뛰어난 조각. 둔황의 석굴 하나하나는 모두 성소이자 미술관이다. 사진은 북위시대 때 조성된 428굴.

석굴을 조성했던 것은 소위 힘 있고 빽 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107굴처럼 설움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기녀들이 돈을 모아 석굴을 조성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촛불 하나에 의지해 몇 년 몇 달을 깜깜한 암흑 속에서 부처님을 새겨나갔을 화공과 조각가들의 예술혼…. 결국 막고굴의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민중들의 피눈물과 정성에 힘입어 모래사막 위에 나투실 수 있었으리라.

1000여 년 세월의 무게에도 그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는 실크로드의 꽃 막고굴. 그 거대한 석벽 뒤로 눈물마냥 맑은 하늘이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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