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못 밝히면 물 한 방울도 소화 못해”
“마음 못 밝히면 물 한 방울도 소화 못해”
  • 채한기
  • 승인 2004.03.22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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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선등 선원장 현산 스님


생각 많을수록 禪과는 거리 멀어
있는 것 비울지언정 비운 것 채우려 말라

중생구제 서원하면 수행도 잘 돼…
부처님 무한한 지혜에 지금 삶 너무 행복해


3월 14일 조계사에서 열린 ‘조계종 선원장 초청 대법회’에서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은 ‘비우고 쉬는 공부가 선’이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현산 스님은 법석에서 선사들의 게송과 일화를 예로들며 ‘쉬는 공부’의 의미를 설파했다.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 한다.

바른 삶이란 가장 가깝게 있는 나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나를 모르면 바르게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참 행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상식과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바닷속 모래를 세는 것과 같이 자기를 바로 아는데는 멀기만 합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 시봉을 40년 했지만 부처님은 “너는 매일 배워도 하루 참선하는 것만 못하다. 금생에 네가 많이 알고 들었지만 네 마음 밝히지 못하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지 못하리라.”며 꾸짖으셨습니다.

신찬 스님이 어느 날 목욕 중에 있는 스승의 등을 밀다가 한마디 던졌습니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그의 스승이 돌아보자 다시 말했습니다. “영험은 없지만 방광은 하는구나.”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의 스승이 경을 읽고 있는데 벌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반쯤 열린 창호지 문으로 나가려 하면서 열린 곳은 못 찾고 창호지만 부딪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찬 스님이 다시 한번 스승을 향해 한마디 던집니다.

“열린 곳은 놔두고, 창호지만 뚫으려 하는구나 백년을 종이를 뚫은들 언제 나오겠는가”

경전만 들여다보면 깨달을 날 있겠느냐 하는 게송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 너무 많이 알고 있어 문제입니다. 이 공부 하려면 마음을 좀 비워야 합니다. 방거사(龐居士)가 말씀하시기를 “오직 있는 것을 비게 할 지언정 비운 것을 채우려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바로 비우면 내 마음 자리 드러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허망한 이 세상, 물거품 같은 세상에 머문 내 몸뚱이는 내가 아닌데 나라고만 하며 집착합니다. 이 순간에도 좋다, 나쁘다, 많다, 적다 분별만 합니다.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과는 거리가 멉니다. 화두를 들었을 때 공부에 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장 빠르게 깨닫는 수행법이 참선이고, 부처님이 전한 것이 이 법입니다. 화두 하나를 잘 들어 깨달으면 무한한 지혜가 드러나 현실을 바로 보고 탐진치에 벗어나 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이대로가 다 법입니다. 수행을 하며 자식과 부모와 싸우면 진정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싸우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사람을 상대할 때도 지혜가 드러나 삿된 욕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승(五乘)에서 말하는 삼승(성문, 연각, 보살)은 다 마음에 따라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도 이 마음을 증도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이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바로 이 미혹한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하 선원의 납자가 이 마음을 참구 하는 것이니 이 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법이 다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불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곽시쌍부’를 보인 것이요, 달마 면벽도 이 마음을 보여주고자 함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불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내 마음 깨닫는데 전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일찍 출가해 참선 공부를 해오고 있는데 부처님의 무한한 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행복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둘이 아니라 하니 난감 할 것입니다. 바로 업 때문입니다. 마음자리 드러나면 영원히 잃지 않습니다.

도(道)는 목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도는 물질과 소리와 말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스님 대중 법문을 할 때 주장자를 들어보이지요? 이게(주장자 보이며) 물질이며 도고 본래면목입니다. 이것은 소리(주장자 내려치며)이면서 본래면목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산승을 보고 듣고 말하는 사이에 분명히 있습니다. 보는 것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이 마음 바로 볼 것 같으면 바로 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방편으로 한 가지의 문이 또 있습니다. 바로 ‘악’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일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에 바로 알 것 같으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업장이 녹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익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화엄경에서도 ‘보현행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량없는 부처님의 자비심 덩어리로 남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현실에서 쓸 때 본래 마음자리가 끊어집니다. 내 문이 활짝 열리면 다른 중생의 업도 대신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듯이 간절한 자비심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업을 대신 받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면 더 잘될 것입니다. 한량없는 서원을 세우고 좋은 마음으로 발원해야 공부도 잘되고 참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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