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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 눈 쏟아 붓듯이 해야 참 수행

  • 사설
  • 입력 2004.03.29 11:00
  • 댓글 0

고우스님│각화사 태백선원장



불교와 선은 둘이 아닙니다. 영산회상 당시 부처님이 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존자가 미소를 보였습니다. 옛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봉황새를 닭이라고 얘기한 것과 같다.” 역대 선지식들의 고구정녕한 일구들도 우리의 멀쩡한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둘러서 말한 게 아니라 바로 끊어서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과 어떻게 그것이 봉황새를 닭이라 하는 것과 같고, 또 역대조사들이 부처님이 발견한 그 위대한 법을 전하는 말들이 왜 멀쩡한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했겠습니까? 이 말속에 불교와 선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둘러가는 말이 아니고 바로 질러서 가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부처님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좥반야심경좦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공인줄 모르고 삽니다. 소리로는 반야심경을 했지만 마음으로는 반야심경을 안 한 것입니다. 좥금강경좦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其心)이란 말도, ‘불성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도 역시 ‘오온개공’이란 말과 같은 소리입니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었는데 그것은 ‘봉황을 닭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하는 소리도 이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중국의 운문 스님이 행복을 느끼고 하신 말씀입니다. 법석에서 “15일 이전은 묻지 않고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라.”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15일 이전은 뭘 말하는가. 제가 이런 소리하면은 큰일날 소리인데 제가 욕먹을 것 요량하고 조금 풀어드리겠습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묻지 않고 그렇게 된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소리입니다. 대답이 없으니 운문 스님이 말합니다. “매일 매일 좋은 날이다.” 좋고, 나쁜게 교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부터는 다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때는 늙고 병들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행복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얘기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오온이 개공이라 하는 그 법을 이해만 하면은 갠지스강 모래수와 같은 탑을 쌓고 금은보배로 보시하는 것 보다 훨씬 복도 많고 위대하다’고 한 것입니다. 연기(緣起)로 중도(中道)를 보면 공(空)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덕산 스님이 도를 깨치고 말하길 자기가 짊어진 좥금강경좦 한 보따리를 불사르고 하는 얘기가 “마음의 경을 보았는데 종이 경이 왜 필요한가” 참으로 위대한 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중요한 학문보다도 그 자리와 비교하면 저 허공에 아주 가는 털을 하나 놔둔 정도밖에 안 되고, 이 자리는 어떤 자리보다 비교해 보아도 저 골짜기에 물 한 방울 떨어트린 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우는 공부를 해서 지혜를 계발하고 반야의 지혜에 의지해 공부하면 해탈 열반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계발하려면 구름을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공부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절에 와서 염불, 기도, 절, 참선 등 다양한 수행을 합니다. 이것은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수단 즉, 방편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목적은 무엇이냐? 오온이 개공이라는 그 자리를 확인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눈을 짊어지고 우물에 갖다 붓듯이 하라’ 합니다. 눈 지고 우물에 부어도 우물이 눈으로 차지 않거든요. 다 녹아 버리고 우물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우물의 기능은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수단인데 목표인양 생각해 수행하면 흙을 갖다 붓는 것입니다. 그럼 우물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거꾸로 갑니다. 거꾸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수행하는 것을 폼으로 잡고 목,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죄송하지만 말이 좀 거칠어도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절에 50년, 60년 된 노보살이 잘못되면 스님들이 ‘도깨비’라고 합니다. 신도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님 중에도 그런 분 많습니다. 평생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신도로 살아왔다면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 도깨비’, ‘ 신도 도깨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왜 그러냐. 수단과 목표를 혼동해서 그렇습니다.

깨침에는 ‘순간 깨침’이 있고 ‘참구 깨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똥막대기다.” ‘똥막대기’란 소리를 바로 듣고 바로 깨치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못 깨치지요. 그러니 할 수 없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부터 100이라는 숫자가 있는데 그것을 직선으로 죽 나열하면 1과100이 굉장히 멉니다. 처음과 끝이니까요. 그런데 그 숫자를 원으로 하면 가깝습니다. ‘순간 깨침’은 1에서 바로 100(원형 나열)으로 가는 것입니다. 안 되는 사람은 한바퀴 돌아서(직선나열) 1,2,3,...100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구 깨침’입니다.

그 자리서 바로 돌아가 깨칠 수 있습니다. 이게 없는 줄 압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조건 1부터 100으로(직선나열) 가서 깨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러나 바로 돌아가 깨치는 사람 많습니다. 이게 ‘순간 깨침’입니다. 이렇게 바로 깨치라고 화두를 주는 것입니다. 무조건 돌아가라고 화두 주는 것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모르니 할 수 없이 의심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은 깨침이 목표입니다. 의심이 목표라면 저 여우새끼는 도인 되고도 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의심하기 위해 봉사하고 염불하고 부처님께 기도합니까? 알기 위해 우리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사진=김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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