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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의 뜨거운 눈물로 무릎을 세 번 적셔라

  • 사설
  • 입력 2004.03.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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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스님│제주 남국선원장


우리는 오늘 하루를 텅텅 비워서 덜어내고 덜어내서 영원 가운데 오늘 하루만큼은 백짓장처럼 맑은 내 마음 부처, 허공과 같은 텅 빈 마음, 텅 빈 하루를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해 보세요. (대중 모두 ‘이’) 누가 ‘이’ 했습니까, 누가 ‘이’ 하고 따라했습니까? 성철 큰 스님께서 제게 ‘이’ 해보라 해 ‘이’ 했더니 “누가 ‘이’ 했노?” “제가 했습니다.” “제가 라고 하는게 누꼬?”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누군인줄 모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어떠한 것이 ‘참나’인가. 누가 ‘참나’인가.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눈을 뜨라면 떠서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입으로 말하지만 여러분들 몸에서 영혼이 딱 나가면 눈이 떠집니까? 죽은 사람들은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눈이 있지요. 있는데 그 사람은 봅니까? 못 봅니까? 그럼 눈으로 보는 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영혼이 다시 들어오면 눈을 뜨고 봅니다. 그럼 그 영혼이 나입니까? 이 몸뚱이가 나입니까? 영혼이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나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두참구법입니다.

그런데 요 근래 법문 한다 하는 스님 들 중 ‘저게 아닌데’ 하는 법문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 주인공이 따로따로 다 있다는 거예요. 영혼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도 영혼이 내 영혼 네 영혼 따로따로 하나씩 있다고 아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은 외도법입니다. 화두법에는 그런 법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병원에서 위장이나 간경화를 고쳐주면 의사선생한테 ‘정말 고맙다’ 하는데 여러분의 몸뚱이가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참 나’를 위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돌아보세요.

몸뚱이가 나인 줄 알고 몸뚱이가 하자는대로 했지만 몸뚱이가 나를 지켜 줍니까? 늙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늙지, 아프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아프지, 죽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죽지, 내 몸뚱이를 아무리 위해 줘 보아야 결국은 나를 배신합니다.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몸뚱이 하자는대로 감정 따라가 운명의 노예가 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걸 보면 내 몸뚱이 위한다고 보낸 시간이 많지 내 몸뚱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내 마음을 위해서 내 ‘마음 농사’ 짓는데 바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참선 공부는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오늘 지금부터 하는 법문이 여러분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워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우려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욕망, 시기질투, 번뇌망상을 화두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두는 부처요, 망상은 중생이니 ‘중생’을 ‘부처’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이 ‘부처’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몸뚱이는 60조의 세포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무량겁(無量劫) 살아온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기록돼 있습니다. 그 기록을 우리는 업장(業障)이라 합니다. 60조에 기록된 모든 업장이 부처로 바뀌어져 가는 기간을 교리적으로는 3아승지겁이라 합니다. 그 업이 얼마나 요원하겠습니까. 내가 내 마음 안으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눈만 ‘딱’ 떴을 때 내가 부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것을 쉽다고 하면 쉽지만 어떻게 중생이 부처 되는 것을 쉽다고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목숨 바쳐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당에도 벽이 있으니 이 방, 저 방, 아랫방 있는 것입니다. 이 벽 다 허물어 버리면 보문사 법당도 없고 허공이 되어 버리지요. 그럼 그 허공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허공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이 부르는 ‘허공’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시야까지를 허공이라 하는데 진짜 허공은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내 성품이 허공이지요. 아인슈타인은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들어오는 모양 허공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 자체는 변함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부처’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것을 깨치고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 구나”했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깨어지는 소리요, 중생이 부처되는 소리요, 참으로 우리를 몰록 다 제도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깨달으면 천하가 깨달은 것이요, 깨달은 눈으로 보면 첩첩산중이 다 부처님 도량이요, 만상의 소리가 부처님 음성이요, 중생의 눈으로 보면 불국토가 사바세계인 것입니다.

너무 육신으로 가고, 너무 멀리 갔으니 마음의 고향으로 핸들을 돌려보자, 그게 화두참선법이니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따라해 보세요.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 하는 놈이 누구냐?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망상이 부처로 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농사’라 합니다.

매일 ‘이 뭣고’ 하며 내 마음 농사는 얼마나 지었는가, 내 마음의 소가 남의 밭에 놀게 놔둔 일은 없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뭣고’를 스승 삼아 ‘이 뭣고’를 할 줄 아는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뭣고’를 대지와 같은 벗, 어머니와 같은 벗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눈 감아서 저승사자를 만나도, 천둥벼락을 치는 날도 ‘이 뭣고’ 하는 이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침을 뱉어도 묻지 않고, 허공에 똥물을 끼얹어도 묻지 않는 허공과 같이 마음을 쓰면 누가 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제 손가락 태우면서 ‘나 혼자 극락세계 안 가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만약 제 법문을 들은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면 그 사람을 업고서라도 부처님 회상으로 나와서 도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결코, 내 얼굴 한 번 거친 사람은 내가 반드시 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 벽만 허물어 버리면 바로 여러분도 나입니다.

오늘 이 법석을 계기로 수행에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사진=김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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