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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숫물이 돌 뚫듯 진력으로 화두 들어라”

기자명 채한기

전 기초선원장 영 진 스님

마조도일 스님 문하에서는 80여명의 선지식들이 배출됐습니다. 그 제자들이 각처에서 크게 활동하면서 선의 황금시대를 이룹니다. 그 제자 중 유독 뛰어난 분 중 한 분이 대매법상(大梅法常) 스님입니다. 법상 스님은 대매산(大梅山)으로 들어간 후 30년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가 대매입니다. 대매법상 스님이 지으신 게송이 있습니다.

<사진설명>3월 28일 조계사에서 열린 '조계종 선원장 초청 대법회'에서 전 기초선원장 영진 스님은 '일체유심조'를 주제로 법문했다.영진 스님이 설한 '마음'의 작용과 '마음 다스림' 에 대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다.

催殘枯木倚寒林하니 幾度逢春不變心고
樵客遇之猶不顧커니 人那得苦追尋고

“베고 버려진 고목이 또한 찬 나무를 의지하니 몇 번이나 봄을 만나도 마음 변치 않았던고. 나뭇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편수(片手)가 이를 어찌 간절히 추심할까보냐.”

최잔고목은(催殘枯木)은 가지는 꺾어지고 잎이 다 말라 겨우 서있는 고목을 말합니다. 그 고목이 차가운 숲을 의지해서 겨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고목은 만물이 생성하는 봄에도 몇번이나 변치않는 봄을 보냈는가 하는 것입니다.
초객(樵客)은 나뭇꾼을 말하고 영인은 도편수를 말합니다. 중국 영인에는 도편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나뭇꾼도(고목)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도편수가 이 나무를 애써서 가져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목’ 처럼 묵묵히 수행해야

최잔고목은 수행자, 즉 수좌를 말합니다. 세상의 쓸모 없는 나무같이, 불러줄 리 없는 저 고목같이 묵묵히 ‘이 뭣고’를 하는 모습이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동안 고행하시고 성불하신 후 49년 동안 중생을 제도하시다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석가모니 탄생은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요즘 같으면 이러한 선언 크게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2600여 년 전의 선언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사성제 계급 사회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선언은 목숨 건 선언입니다. ‘아’란 무엇이길래 천상천하에서 가장 높은가. 또 나는 ‘고’를 편안케 하겠다. 그 ‘고’는 무엇인가. ‘아’와 ‘고’만 해결하면 불교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진설명>봄이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1,300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했다.

극락·지옥 마음에 달려

왜 ‘고’일까요. 죽고 싶은 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죽기 싫어도 병들고 죽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가 그대로 ‘고’인 것입니다. 어제 하룻밤 잘 주무셨지요? 수행자 시각에서 보면 자는 것도 공부가 끊어진 것이니 죽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룻밤은 편안하게 주무십니다. 왜냐? 밝은 내일이 또 있을 것을 알고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러나 죽음은 몰라요. 그러니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죽은 뒤의 세상이 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죽음도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극락과 지옥이 궁금하십니까? 경전에도 많이 나오지만 제가 일본 선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사무라이가 선사를 찾아가 극락과 지옥에 대해 알려달라 했습니다. 사무라이 살생을 많이 해 괴로웠나 봅니다. 그런데 이 선사가 사무라이를 향해 막 욕을 퍼붓습니다. 듣고 있던 사무라이가 “스님, 이제 욕은 그만하시지요” 했는데 계속 욕을 퍼붓습니다. 사무라이는 그 욕을 감내하기 어려워 “스님,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목을 베겠습니다”했습니다. 그래도 선사는 욕을 합니다. 화가 난 사무라이는 결국 칼을 빼들고 선사의 목을 치려했습니다. 그 순간 선사는 “그게 지옥이다”하고 한마디 던집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라이는 칼을 내려 놓으며 “죄송합니다”합니다. 선사는 “그게 극락이다”합니다.

극락과 지옥을 이처럼 선명하게 드러낸 것 보기 어렵습니다. 극락이 서방정토에만 있겠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예입니다. 이 자리가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극락입니다.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에 너무 유념하지 마세요. 이 자리서 즐겁고 바르게 살면 사후 극락은 저절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좥원각경좦을 보면 ‘허공도 마음에서 나왔다’ 합니다. ‘마음’은 우주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속에는 선악 구분이 없다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과 우리 마음은 또 분명 다릅니다. 금은 어떻게 나옵니까? 광석 자체가 금은 아닙니다. 그 광석을 녹여야 합니다. 바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과정 거쳐 나온 금은 다시 흙 속에 넣어도 그대로 금입니다. 부처님 마음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윤회하지 않는 마음이고 우리 마음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화두 안되는건 느슨하기 때문

바로 이러한 마음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화두를 듭니다. 그런데 화두를 바꿔도 되느냐 하는 질문을 해오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지금 ‘이뭣고’를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만 처음엔 잘 안됐습니다. 해도 해도 화두가 끊기기에 바꾸기로 했습니다. 수좌가 화두 바꾼다는 것도 보통일 아닌데 저는 제가 혼자 바꿨습니다. 역시 종문 제일은 ‘無’이니 ‘無’자 화두를 들자. 그런데 ‘무’를 드는데 안되던 ‘이 뭣고’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래 난 죽어도 이 뭣고다’하고 ‘이 뭣고’를 듭니다.

화두는 정말 간절하게 들어야 합니다. 나옹 선사는 “생각이 일어나는 때를 생(生)이라 하고, 생이 멸할 때를 사(死라)한다. 생과 사의 문제 부딪쳤을 때 진력으로 화두를 들어라”했습니다. 낙숫물이 돌을 뚫듯이 화두는 들고 또 들어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 고요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고요한 가운데도 화두가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큰 분심을 내어 보세요. 용맹정진 한 1주일 한 후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야, 일주일 용맹정진 끝났다’하고 홀가분 해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쪽 귀퉁이에서 통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용맹정진을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일주일이 또 헛탕이구나’ 하고 펑펑 우는 것입니다.

선지식을 찾아가는 마음에서부터 화두타파를 향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름됩니다. 중국의 옛 스님들이 선지식을 찾아가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교통도 좋고 전화도 있어 선지식이 산사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옛날엔 어느 산사에 눈밝은 선지식이 주석한다는 말 하나 믿고 천리길을 마다 않고 걸어갔습니다. 광활한 대륙을 걷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에서부터 구구절절한 것입니다.
화두가 안 된다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느슨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대분심을 내어 간절하게 화두를 드시면 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습니까? 수행도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정리=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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