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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처경(念處經) ②

기자명 법보신문

‘알아차림(sati)’ 있어야 번뇌 끊는다



무엇이 네 가지 알아차림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염처경(念處經)』의 중심된 과제는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여기에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염처는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번역되는데, ‘sati’는 ‘알아차림’으로 ‘patthana’는 ‘확립’에 해당된다. 확립으로 번역되는 ‘patthana’는 ‘다가가다’는 의미의 ‘pa’와 장소를 의미하는 ‘sthana’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의 확립(念處)이란 몸과 같은 대상의 장소에 다가가서 머물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비담마론서에서는 염처를 염주(念住)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에 다가가서 어떻게 머물 것인가? 그것은 ‘열렬함’, ‘분명한 이해’, ‘알아차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열렬함이란 정진에 대한 열정, 부지런함을 말한다. 분명한 이해는 무상, 고, 무아라는 대상의 특성에 대한 철저한 통찰로서 집착을 방지한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음을 뜻한다. 현재에 직면하여, 과거의 흔적이나 미래의 바램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일반적으로 분명한 이해(知)가 바른 견해에 해당된다면, 알아차림(念)은 마음의 평정과 관련된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는 공허한 개념이 된다. 개념은 안개처럼, 흐릿하고 애매하여, 살아있는 지혜가 아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이며, 직접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반대로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된 알아차림은 집착을 증대시키는 경향도 있다. 이런 경우 결국은 대상의 폭류 속으로 휩쓸려 표류하게 되고, 마음의 평정은 무너진다.

최근에 알아차림(念)에 대한 번역의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 한역에서는 ‘마음에 두다’는 의미에서 ‘염(念)’이라고 번역을 했다. 사띠의 본래적인 의미가 ‘잊지 않고 기억하다’는 범어 ‘smrti’와 동의어이기 때문에, 念이란 번역은 좋은 번역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염이란 낱말은 ‘생각’이라는 분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많아, 사띠의 본래적인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을 비롯하여, ‘마음챙김’,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다양하게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영어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주목(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주의깊음(mindfuiness)으로 번역되고 있다. 어떻게 번역하여 사용되든지, 사띠의 확립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지금 어깨의 느낌을 관찰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먼저 의식을 어깨로 옮기고, 둘째 주목하여 그 장소에 머무른 다음, 셋째 그곳의 느낌을 지각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만약 해석자가 의식을 돌려서 어떤 특정한 장소로 다가가는 첫 번째 의미를 귀중하게 여긴다면, 그는 사띠를 ‘주의집중’으로 번역하여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소로 곧장 의식을 옮기지 않고, 어깨에 머무는 두 번째의 의미를 강조한다면, ‘주의깊음’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할 것이다. 하지만 장소에서 느끼는 느낌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을 강조한다면, ‘알아차림’이나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알아차림(念)과 바른 이해(知)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은 필요하다. 이들은 쌍둥이처럼 함께 자주 설하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깨라는 장소에로 다가가서 그 특정한 느낌을 ‘포착’하는 일은 알아차림의 역할이다. 하지만 어깨에서 발생되는 느낌을 마음의 작용과 구별되는 성격과 무상성에 대한 ‘통찰’은 사띠의 영역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知)의 영역이다.

인경 스님 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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