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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뭣고 30년…이 생 다하기 전 끝낼 것”

기자명 채한기

달공(達空) 조 홍 식 翁

84 고령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화두 들어

30여년 수행 길 무문관 한 달 정진 “내 삶의 최고 보람”

古州山房서
홀로 텃밭 가꾸며 비우고 또 비워


<사진설명>고주산방을 마련할 때 심은 목련, 매화, 소나무가 달공거사의 ‘마음’과 함께 자라 이젠 벗이 되어주고 있다.

중앙신도회, 교수불자연합회, 참여불교재가연대 등의 고문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 명예교수 조홍식(84세) 옹은 불자들 사이에서는 달공(達空) 거사로 불린다. 올해 84세의 나이지만 지금도 경기도 하남에 마련한 고주산방(古州山房)에서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이 뭣고’를 든다. 침묵의 시공간 속에서 화두 드는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달공 거사는 지금, 지나 온 한평생을 가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한 판 벌이고 있다. “이 뭣고 30년입니다. 이 생 다하기 전에는 끝내야지요.”

달공 거사는 지난 30여년 전 송광사에서 보살계를 받고 구산선사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40대 후반에 불문에 들었지만 불조의 씨앗은 이미 10대에 심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군들이 중국 본토에서 기승을 부리던 무렵, 10대 후반이었던 어린 조홍식은 몸이 아파 어머니를 따라 한 겨울 북한 묘향산 한 암자에서 삼칠일 관음기도를 올렸다. 기도회향 후에도 하산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혹한의 한 철을 암자에서 보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절밥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국 끓이고 밥짓고 설거지까지 도맡아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왔지만 어린 조홍식은 산사를 떠날줄 몰랐다. 암자를 찾는 스님들로부터 듣는 불법에 조금씩 사로잡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산대사가 주석하던 법왕대가 유명해 당시에도 이곳을 찾는 순례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카락만 깎지 않았지 사미승이나 다름없던 아이에게 스님들은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차를 달여 올리면 스님들이 먼저 말씀을 걸지요. 처음엔 어디서 왔느냐, 나이는 몇이냐 묻다가 법문을 들려주시고는 했지.”

법문도 단순한 교리법문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 선사들의 일화를 통한 선법문을 들려주는가 하면 수행하는 자세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달공 거사는 법천(法泉) 스님과의 인연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오전에 설거지가 끝나면 스님한테 매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지. 절의 법도와 행자로서의 예법을 알게 되니, 앞서 나의 거친 몸가짐이 부끄럽게 여겨졌어요. 묘향산에 들기 전과 후의 내 거동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지.”

조홍식의 마음에 점차 불심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하산해야 했다. 세속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권고가 준엄하게 내려진 것이다. 달공거사는 “어머니를 따라 먼발치에서 넘겨보기만 하던 불교에 성큼 다가가서 껴안아 볼 기회를 가졌다”고 회고한다.

이후 성균관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달공 거사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릴르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어린왕자』 저자 생텍쥐페리 연구로 문학박사를 받은 달공 거사는 성균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와 문과대학장,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기에 이른다.

“교수로 있었으니 전공분야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지. 하지만 불교는 그 이상으로 내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애. 불법을 만나는데 나이가 따로 있나요. 나이 많은 처사였지만 송광사에서 계 받고 구산 스님 찾아가 법을 구했지.”

구산 스님이 달공 거사에게 준 화두가 바로 ‘이 뭣고’다. ‘달공’이란 법명 역시 구산 스님이 지어준 것이다. 구산 스님은 당시 사간동 법련사를 자주 찾아 일찌감치 재가불자들을 수행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달공 거사도 법련사에서 정진하며 깨달음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고 급기야 구산 스님은 죽비를 달공 거사에게 건네며 입승을 맡게 했다.

그로부터 지난 30여년 동안 달공 거사는 ‘이 뭣고’ 화두를 놓지 않았다. 전국의 산사를 순례하며 고승대덕 스님들의 법문을 청해 듣고, 안거 기간이면 어김없이 가열찬 정진에 들어갔다. 10여년 전 대자암 무문관에서의 한달 정진은 달공 거사가 노년에 이르러서도 화두를 놓지 않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입실하면 그 순간 육중한 자물쇠가 채워지는 무문관. 공양을 가져오고 빈그릇 내가기 위해 하루 두 차례 방문 옆 아래쪽에 두 손바닥 넓이의 이중문만이 소리 없이 열리는 네 칸 공간.

“한 번 혼자 해보고 싶었어요. 정말 세속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이 화두 하나만 들고 싶었지.” 그 한 달은 길고도 길었을 것이다. 절대 고독과 절대 자유가 공존하는 곳이 아닌가.
“처음에는 화두 주인이 분명 나 자신이었지만 어느 사이에 나는 화두에 예속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나의 일희일비(一喜一悲)가 모두 화두 때문임을 실감했지. 분명 나는 화두를 잡았지만 결국 화두에 잡히고 말았지. 화두와 내가 하나 되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달공 거사는 이 정진으로 적어도 무엇인가를 구하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연 듯 하다. “왕국(무문관)에서 왕자처럼 자존심(수행)을 지켜나가기 위해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했지. 무엇보다 평소처럼 무엇을 구해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그지없이 천박스럽게 여겨졌어요. 그래 아무 것도 구하지 않기로 했지. 이 한가지만으로도 산란심이 정리되어가는 듯 했어요.”

조금씩 공부가 더 성성히 지어갈 즈음엔 입실 기간이 지나 무문관을 나와야 했다. “조금만 더 있었어도...”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달공 거사는 “수행은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래 수행이란 세속이 따로 없고, 수행하는데 시끄러움과 조용함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웬만한 경지 아니고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도 조용한 곳에서 화두를 들어야 정진이 잘 돼요.”
서울에서 생활하던 달공 거사가 서울 외곽 변두리인 경기도 하남에 산방을 마련한 것도 그 조용함을 취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서 용맹정진 하자”는 원력으로 산방을 마련해 놓았지만 처음 10년은 그리 자주 머물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두 번이었고 삼동(三冬)에는 아예 자물쇠가 채워졌다. 그 이유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밥을 해 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가나하는 생각에 선뜻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더군요. 어느 틈엔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렸던 겁니다. 일상의 구습에 사로잡혀 한발짝도 떼어놓지 못하는 일이 어디 이 뿐이겠어요?”

30여년이 지난 지금 고주산방은 달공 거사의 더 없는 도량이다. 조그만 텃밭에서 흙을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행복을 다 가진 것”이라 말하는 달공 거사. 고주산방을 지으며 심어 놓은 매화나무와 목련나무가 지금은 크게 자라 꽃을 한껏 피우고 있다. 그의 돈독한 불심만큼이나 자란 소나무도 큰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이곳에서 달공 거사는 나름대로의 선교(禪敎)를 하나씩 터득해 갔다. 달공거사의 수승함과 선지는 달공 거사의 수필집 『달처럼 매화처럼』(도피안사)과 선시 해설집 『禪心詩心』에 확연히 드러나 있다.

달공 거사는 지금 아무 것도 취하려 하지 않는다. “諸法不動 本來寂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이 간단없이 흔들리는 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습니다. 오랜 관행과 인습때문이겠지요. 이런 기존의 모든 것을 떨어버릴 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비워질 것입니다.”
역대 조사는 분명 ‘쉬고 비우면 깨닫는다’고 했다. 달공 거사는 ‘이 뭣고’화두를 들면서부터 쉬고 비우며 한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적적(寂寂)하고 한가로운 고주산방에 성성(惺惺)한 달공 거사가 화두를 들고 있다. 삼매는 이미 찾아왔을 것이다. “이 생을 마치기 전에 끝낼겁니다.”는 달공 거사의 표정엔 미소가 넘쳤다. 달공 거사의 미소를 보는 순간 선구 하나가 떠올랐다.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울 것도 없어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려 않고 참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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