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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이고 냉담하면 눈 먼다

기자명 법보신문
허 우 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필자는 최근 용성 선사(1864-1940)를 읽고 있었다. 필자가 읽은 선사는 근대 한국에 등장했던 불교 사상가들 중 여러 면에서 중도를 잘 지켜나간 분이다. 도 닦다가 산 속에 파묻혀 세상을 잊지도 않았고, 세상에 둘러 빠져 출가자의 신분을 망각하지도 않았으며, 전통을 지킨다고 변화를 무시한 것도 아니고, 혁신을 도입한다고 옛것을 팽개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중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었다.

선사가 중도를 지켜간 일은 그의 ‘혁명적 민종교(民宗敎)’라는 용어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 말을 경봉 선사(1892-1982)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대각교(大覺敎)를 지칭하면서 사용했다. 혁명적 민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뇌하는 백성의 모습을 보지 못하거나 그들의 외침을 듣지 못하면 진실한 종교도 아니고, 시대를 따라가는 혁명적인 종교도 못된다. 용성은 당시 기독교와 유교 및 일제의 세력을 보고, 조선불교를 잘 지킬 것, 일반 중생에게 한문 경전이 너무 어려우니 불경을 번역해 줄 것, 이런 것들을 시대의 외침으로 들었다. 대각교 운동이 새로운 운동이긴 하지만 그의 ‘대각’이 붓다의 번역이듯, 이 운동은 한국 선불교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고, 석존의 불교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역경의 취지를 밝히는 자리에서 선사는 “신유(1922) 여름 4월에 내가 세계의 사조와 문학의 변천됨을 靜觀하고 즉시 역경에 착수”했다고 했다. 1923년 선사는 “때의 운이 변해가고, 민의 지식이 改新하고 사조가 일변이라 지식계급도 경제생활에서 경쟁하므로 어떤 여가에 한문을 오래 읽을 수 있을까?”라고도 물어 봤다. 그는 세상을 정관하면서 사조가 달라졌고 세상이 아주 경쟁적임을 알았다. 그래서 쉬운 한글로 된 경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선사는 변화하는 세상을 보면서 혁명적인 불교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의 혁신을 강조했다. 하지만 출가자의 신분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시종일관 禪律의 겸행을 강조했다. 바꾸자면서도 전통적 선율의 겸행을 강조한 것, 이 점에서 그는 3·1 운동에 동참했던 만해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용성은 시대사조에 맞추어 불교를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하면서도 옛것을 지켰다. 지켜야 할 것은 임제종의 선 전통과 지계였으며, 시대와 상황에 맞추어 그가 요구했던 것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중적 불교, 불교단체의 경제적 자립, 일제가 내세운 본산 제도의 폐해와 탁발의 폐지였다. 대각교 운동은 이를 체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이런 자각은 전통 불교 집안에서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아마 이 자각에 1910년 이후의 서울출입과 3·1 만세 운동 이후의 감옥경험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관 또는 관이라는 깨달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당대의 동료들이 퍼붓는 갖가지 비난, 구설수, 시비에도 불구하고, 선사가 세상을 계속 바라보면서 혁명적 민종교를 유지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자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자비심의 출처는? 선척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출가 이후 배웠던 천수경 독송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선사에게서 배울 바는 ‘사랑하면 보이고, 냉담하면 눈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불교의 요체이기도하다. 이제 선사의 시대는 갔고 역경사업은 끝났다.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고 역량은 어느 정도일까? 그들이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지만 대비심을 일으키면 그 속에서도 참모습이 보일 것이다.

huh111@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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