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 진다
윤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 진다
  • 법보신문
  • 승인 2004.04.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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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병 조
동국대 교수

불교에서는 인생을 일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없는 나고 죽음의 연속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 꽃에는 벌 나비가 날아들어 꿀을 탐한다. 벌 나비는 그 보다 강한 날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아무리 강력한 생명이라도 결국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간다. 그 흙을 토양으로 하여 또다시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이다. 이 우주와 생명의 거대한 연결고리, 생사의 반복을 윤회라고 부른다. 따라서 윤회를 믿는 이에게 있어서 오계 등 불교의 윤리를 준수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 만나고 있는 객관 세상이 전생에는 바로 내 형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윤회를 생각할 때 비로소 인간은 겸손해질 수 있다.

최근 어느 유명인이 이 윤회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뜻있는 이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더구나 불교 박해를 이념화하기 위한 500년 전의 글을 인용하여 불교 비판을 정당화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윤회의 비과학성을 논한다. 증명할 수 없는 진실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그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그날 밤 그의 부모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불교인의 폐해를 말할 수 있다. 잘못된 종단 질서를 꾸짖거나 땅에 떨어진 윤리도덕성을 나무랄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성을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다. 21세기를 문화와 협력, 상생(相生)의 시대로 규정한다면, 그의 주장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를 부인하는 것이다. 불교가 부인될 때 그 상대의 가치 또한 몰락해야 한다.

지식인은 감성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하며, 또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참회해야 한다.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오만은 이 시대 불행의 단초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배불정책을 분석해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먼저 승려들의 비행을 거론한다. 두 번째 단계는 불교의 지향점이 출세간이기 때문에 현실적용은 무리라는 논리이다.

마지막 단계가 불교교리에 대한 비판이다. 이번 윤회부정논리가 이와 같은 단계를 밟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평소의 쇼맨 쉽처럼 일회성의 해프닝이었다면 차라리 웃어넘기겠다. 그러나 그 불교비판이 순수하지 못한 목적성을 깔고 있는 것이라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헤겔은 싸움에도 이성적인 경우와 감성적인 경우가 다르다고 했다.

이성적 다툼인 경우는 상대방이 냉정해진다. 그러나 감성을 건드렸을 경우에는 광폭해지는 법이다. 불교의 진리는 영원하다. 다만 그 진리를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다소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혼동하는 비판은 이미 비판이라기보다 욕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금 세상은 온통 감성적인 다툼이 난무하고 있다. 여야가 정책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서로를 헐뜯고 있다. 노사가 논리로 대결하기 보다는 힘겨루기의 양상을 보인다. 공멸(共滅)이 싸움의 종말인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윈·윈, 상생의 도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타협과 양보가 무시된 채 오로지 적개심으로 무장한 사바세계에서 그나마 불교와 같은 사색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윤회를 생각할 때 인간은 겸손해 진다. 과거와 미래를 조망하면서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윤회의 결과는 인과응보이다. 이 냉엄한 진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내 삶에 충실해야 하며 진실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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