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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日 도쿄대 스에끼 후미히꼬(末木文美士)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가마꾸라시대 불교사 연구 日 불교사상사 재정립

원래 일본불교가 전공이었던 스에끼선생의 대표적 학설은 박사논문을 정리한 『평안초기불교사상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종래의 일본불교연구는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진종, 도원의 조동종, 일련의 법화종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겸창신불교(鎌倉新佛敎)’만이 일본불교사상의 정점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그 이전의 천태종을 대표로 하는 불교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한 호국불교 뿐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스에끼선생은 최징(767~822), 공해(774~835), 원인(794~864), 원진(814~891), 덕일 그리고 태밀의 완성자인 안연(941~?)등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겸창불교가 중세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틀은 이미 평안시대초기부터 형성되어, 겸창불교는 그것을 전개 혹은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현재는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근년에는 ‘근대일본불교와 전쟁협력’의 문제나 신과 불을 둘러싼 신불습합(神佛習合)등에 관해서도 정력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그 관심은 불교뿐만 아니라 ‘불교를 기조로 한 일본사상전반‘에 걸쳐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간 학창시절부터 절서 수행

한편, 스에끼 선생은 선 연구자이기도 하다. 학생시절부터 일본임제종 남선사파(南禪寺派)의 절에서 30년이상 수행해 온 스에끼 선생은, 특히 <벽암록연구회>에 참가하여 2002년 일본 최초로 『벽암록 현대어역』(상),(중),(하)를 출간하였다. 벽암록은 종래 일본에서 많이 읽혀지고 간행되었으나, 선승의 강화집이나 한문식의 훈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벽암록 현대어역』은 중국어학연구의 성과에 기초하여, 평이한 현대일본어로 번역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스에끼선생은 『벽암록을 읽는다』(1998년)를 통해서, 간화선을 언어학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특색이 있다. 요컨대, 간화란 ‘말을 보다, 말을 주시하다‘는 의미이고, 말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방법이다. 그러나, 이 때의 말이란 일상언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떠난 ‘해체된‘ 말이다. 『벽암록』제2칙의 본칙과 설두의 송을 통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本則)擧.趙州示衆云,至道無難,唯嫌揀擇.有語言,是揀擇是明白.老僧不在明白裏.是汝還護惜也無.時有僧問,旣不在明白裏,護惜箇什.州云,我亦不知.僧云,和尙旣不知,爲什却道不在明白裏.州云,問事卽得, 禮拜了退.

간화선, 언어학적 관점서 파악

‘至道無難,唯嫌揀擇‘는 원래 『信心銘』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조주는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그것은 취사선택이 되고, 또 명명백백하게 되어 버린다(有語言,是揀擇是明白).’고 한다. 즉 언어로 인해서 취사선택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좋다, 싫다고 하는 감정도 먼저 ‘이것‘, ‘저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비로소 생기며, 그것은 감정보다 언어가 더 근본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조주는 ‘구별의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是揀擇是明白)’라고 한다. 명백이란 보통 깨달음(구별이 없어진)의 세계를 말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러한 말 자체가 ‘명백‘을 ‘취사선택‘과 구별하고 있다.

‘취사선택’과 구별하는 곳에 비로소 ‘명백‘이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주는 ‘나는 그러한 명명백백한 곳에는 있지 않다(老僧不在明白裏)’고 한다. 그러나 조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승은 ‘화상도 알지 못하면서, 왜 “나는 명명백백한 곳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和尙旣不知, 爲什魔却道不在明白裏)’라고 조주를 밀어부친다. 즉‘분별을 초월하고 있다면, 명백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명백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도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논리가 통하는, 당연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승의 질문에 대한 조주의 대답은 ‘묻는 것은 괜찮지만, 예배하고 물러가라(問事卽得, 禮拜了退.)’이다. 이 대답의 의미는 논리적인 이해로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중요하다. 조주는 이와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일상의 언어체계를 부숴버리고 있다.

일상의 언어는 모순이 없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조주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에 의해 고정된, 일상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의 세계를 부수어버린다. 즉 유동화시키는 것이다. 모순된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언어체계자체를 부수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말인 것이다.
다음에 설두중현(雪竇重顯)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至道無難,言端語端.一有多種,二無兩般.天際日上月下,檻前山深水寒.識盡喜何立,枯木龍吟銷未乾.難難.揀擇明白,君自看.

먼저, 본칙에서 조주가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취사선택이 되어버린다’고 한 것과 반대로 설두는 ‘하나하나의 말이 그대로 지극한 도이다.(至道無難,言端語端)’고 한다. 그런데, 이 때의 말이란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 그 말이 근본에 있어서 해체하고, 또 생성해가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인 지도(至道)가 하나하나의 말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하나가 아니라 수많이 있는 것이며, 또 반면에 둘이라고 해서 두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의 지도로 되는 것이다.(一有多種 二無兩般) 재미있는 것은 ‘시신은 지각이 없으니, 정은 일어날 수가 없다.

중국어학 연구…『벽암록~』 발간

마른 나무가 바람에 울어도 완전히 마른 것은 아니다(識盡喜何立, 枯木龍吟銷未乾)’의 부분이다. ‘시신은 지각이 없으니, 정은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식도 없고 정도 없어진 세계, 달리 말하면 말의 세계, 일상의 세계가 해체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마른 나무가 바람에 울어도 완전히 마른 것은 아니다.’ 용음(龍吟)이라는 것은 마른 나무가 바람이 불자 ‘우’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다. 즉, 마른 나무가 바람에 소리를 내는 것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아직 무언가 남아 있다. 즉 언어가 해체해 가지만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곳에서 있음도 없음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상을 간단히 이원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언어가능의 세계와 언어불가능의 세계가 나누어지는 접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고목룡음(枯木龍吟)이다. 그 아슬아슬한 양자의 경계선에 서는 것에 의해, 확고해 보였던 양자의 구별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을 기호론적으로 말한다면, 말의 의미가 해체해 가는 곳에서, 그렇다고 해서 말이 없어져 버린다든지, 다른 세계로 가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다. 해체해가는 작용 그 자체를 철저하게 추궁해 가는 것이다. 그곳에 선에 있어서의 첨예한 언어에의 의식이 엿보이는 것이다.

동경대 박사과정 정영식 salzini@l.u-tokyo.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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