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①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법보신문

"원형 논쟁은 석굴암 죽이기에 불과”

석굴암의 원형복원에 대한 논쟁은 그동안학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목조전실의 유무,본존불 앞에 아치형으로 놓인 홍예석의 유무 등 석굴암의 원형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1912년 경주 동양헌에서 발행한 ‘신라고적 석굴암석불’ 이라는사진첩을 입수한 재야미술사학자 성낙주 씨는 강우방 교수를 비롯해 일부 서울대 출신 학자들이 제기한 학설을 뒤집는 새로운 주장과 증거 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해 “그 동안 석굴암의 원형에 관한 주장들은 역사적인 고증보다는 문화재 학계의 주도권 잡기에 의한 힘겨루기에 불과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법보신문은 창간 16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으로 재야미술사학자 성낙주 씨가 그 동안 기존 학계가 주장해 왔던 석굴암의 원형을 정면으로 뒤집는 자료와 사진, 관련 글을 9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사진설명>한국불교 건축-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석굴암이 원형논쟁에 휘말려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석굴암 본존불.

경주 토함산 중턱에 피어난 장엄한 화엄만다라. 신라 경덕왕대 시창된 석굴암은 1000여 년이 경과한 현재, 동양 전체의 불교건축 및 조각예술을 대표하는 불후의 걸작으로 국내외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석굴암은 참담을 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주실의 석조 돔 지붕은 앞쪽 1/3가량이 도괴되어 커다란 동혈(洞穴)이 뚫리는 등 당장이라도 전면적인 붕괴가 일어날 위기였다. 각종 석재와 토사 및 기왓장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 본존불의 연화대좌까지 메웠는데, 전실의 판석들이 뒤틀리고 어긋난 가운데 잡초가 무성했으며, 폭우와 폭설 및 동해(凍害), 그리고 짐승들의 틈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60년 보수공사 모두가 잘못된 것?

그때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수차례의 보수공사 끝에 비교적 안정을 되찾긴 했지만 석굴암은 전혀 다른 성격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른바 ‘원형논쟁’이라는 덫에 걸려 정작 그 실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가 수십 년 동안 지체되어 온 것이다. 덕분에 『삼국유사』 소재의 ‘김대성설화’에 대한 신화학적 해석이나 석굴암에 구현된 미학원리, 혹은 동양고대건축에서 유일무이한 석조 돔 지붕의 기원 문제 등이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자못 치열하게 전개되어 온 원형논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다. 곧, 비판의 주체가 특정 학맥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과, 1960년대의 보수공사를 담당한 전 동국대 황수영 교수가 그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때의 잘못으로 석굴암이 원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결로 현상 등에 의해 주벽 조각상들의 피해가 심화되었다는 등 황수영 교수가 잘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원형논쟁의 일관된 답안이다.

그러나 예컨대 목조전실 철거론 같은 견해는 석굴암이 부처님과 그 권속을 모신 불교라는 종교의 성전이라는 사실과, 동해에 면한 토함산의 특수한 자연환경 등을 인식한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몰상식의 극치이다. 만약 그들 주장대로 전실 위에 1300년 동안 아무런 보호시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석굴암이 남아 있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또, 주실 지붕 앞부분에 이른바 광창(光窓)이 있었다는 주장 역시 주실 및 비도의 구조상 토목공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렇듯이 원형논쟁의 쟁점들은 차마 학설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운 것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이렇게 볼 때, 석굴암 원형논쟁의 본질은 학문의 외피를 걸쳤을 뿐, 특정 학맥, 혹은 공명심에 들뜬 일부 학자가 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치졸한 싸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령 보수공사를 그들 학맥이 주도했다면 논란은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며, 혹 다른 이가 맡았다면 그 역시 속죄양이 되었을지 모른다.

특정 학맥 앞세운 치졸한 싸움

문제는 그것이 단지 ‘황수영 죽이기’에 머물지 않고, ‘석굴암 죽이기’로 이어졌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학계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석굴암학(石窟庵學)의 진정한 발전을 저해했을 뿐 아니라, 석굴암을 바라보는 일반대중의 인식에 씻을 수 없는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KBS의 역사스페셜 같은 프로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면서, 석굴암에 서려 있는 당대 신라인들의 고뇌와 비원, 전체 조각상들에 흐르는 아름다움이나 사유체계, 혹은 동서양 건축사에서 유일무이한 석조 돔 건축물로서의 가치와 의의 같은 석굴암의 본질적 측면보다, 비생산적인 원형논쟁의 쟁점들이 석굴암의 요체이자 전부로 곡해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 원형론자들의 비과학적인 학문 태도에 대해서도 엄정한 비판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자료든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깎고 잘라내어 의미를 굴절시키고 과장하길 능사로 해 왔는데, 지난 1991년 발굴된 사진첩‘신라고적석굴암석불(新羅古蹟石窟庵石佛)’에 붙인 강우방 교수의 해제가 그 좋은 예이다.

그 사진첩은 지금껏 공개된 석굴암 관련 사진들 가운데서 시기가 가장 앞선 것으로, 1913년 시작된 일제의 1차 보수공사 이전 조각상 모두의 실상을 알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자료였다. 그만큼 거기서 얻어질 수 있는 정보량은 풍부했지만, 강우방 교수는 「한국일보」(1991.4.1)와 「월간미술」(1991.5)에서 오히려 그러한 정보를 철저하게 굴절시켰다.

일례로 그 사진첩의 본존불 사진을, 현재 주실 입구의 홍예석이 철거해야 한다는 종래 주장의 결정적인 물증으로 내세웠지만, 그러나 거기에 안 보인다고 해서 원래부터 없었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며, 그 무렵의 다른 많은 사진들에는 양쪽 첨차석 끝에 무언가가 걸쳐 있던 홈 자국이 여실하다.

전 서울대 남천우 교수와 한옥전문가인 신영훈 선생이 비도 입구에 달려 있었다고 말하는 ‘석문(石門)’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신영훈 선생은, 조선조 선비 우담 정시한의 글에 나오는 ‘석문’이 비도의 아치형 입구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엉뚱하게 ‘목조대문’으로 오역하고 있다.

현 우리 지식시장의 독과점 구조 하에서는 제아무리 좋은 사료가 발굴되어도 그 정보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사실, 원형론자들의 자가당착은 다름 아닌 ‘원형’이란 낱말 자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필 붕괴 직전에 처한 석굴암을 기준으로 ‘원형’ 운운하는 것부터 불의의 사고로 수족을 잃은 사람에게 정상이라고 말하는 식의 궤변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위의 사진첩과 동일한 사진첩을 입수해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들 원형론자들의 주장이 갖는 허구성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쟁점들을 좀더 일관된 시각에서 엄정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제 「법보신문」의 지면을 빌려 총 8회에 걸쳐 그 동안의 쟁점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필자의 졸고에서 혹 과오가 있다면, 건강한 비판과 질책 속에 창조적인 논쟁이 펼쳐지길 고대한다. 정체 상태에 빠진 석굴암학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재야미술사학자 성낙주 chakraba@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