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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문성 스님 (1897년∼1997년)

기자명 권오영

근현대 대표적 보현행자

친일승 출송 앞장
100세 노구에도 운력
97년 7월 10일 입적


문성 스님은 평생을 보현행자로서의 삶을 실천한 수행자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좌선과 울력, 포행, 오후불식 등 젊은 수행자도 쉽게 따르지 못하는 정진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중생들을 위한 이타행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문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집 근방에 위치한 통도사를 자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불법에 인연을 맺게 된다. 14세 되던 해 고성 옥천사에서 설운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문성 스님은 이후 통도사 강주였던 서응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 받으면서 출가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제시대라는 암흑기에 출가한 문성 스님은 이후 출가자의 본분보다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도외시 한 채 불법을 참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당시 통도사 조실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육혈포삼발(六穴包三發)이 승어독서천권(勝於讀書千卷)’이라는 주제 강연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1919년 해인사에서 20여명의 학인 스님들과 삼일운동을 주도한 문성 스님은 이후 당시 일본 언론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됐던 당대 미문의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불교계 대표적인 친일승이었던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광화문 사거리에서 명고출송(鳴鼓出送)시킨 것.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은 뒤로 한 채 친일활동에 적극 나서는 친일승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문성 스님의 이 같은 강직함은 해방 이후 정화불사에도 참여하게됐으며 특히 정화 직후인 72년 감찰원장 소임을 맡으면서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된다. “소위 출가자라는 사람들이 처자식을 거느려서야 되겠느냐.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중노릇하려면 똑똑히 해야지.” 대처승들에게 이 같은 꾸지람을 했던 스님은 언제나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강조했다.

74년 감찰원장을 사임한 이후 공식적인 행사에 일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스님은 부산에 관음정사를 창건하고 이때부터 수행에만 전력을 다한다. 출가자의 본분은 오로지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은사인 서응 스님의 영향으로 보현행원품을 화두삼아 늘 수지독송하며 보현행자의 삶을 실천했다. 특히 스님은 100세에 가까운 노구에도 불구하고 새벽예불, 운력, 참선 수행 등을 게을리하지 않아 젊은 수행자들에게 수행자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이기도 했다.

평생을 보현행자로서의 삶을 실천했던 문성 스님은 1997년 7월 10일 자신이 창건한 관음정사에서 세수 100세, 법랍 84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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