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찰
법관찰
  • 법보신문
  • 승인 2004.07.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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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싶음의 분별 관찰
언어 훈습 모두 녹을 때
진리도 그대로 다가와
위파사나의 수행은 신·수·심·법이 단계적인 체계를 띄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몸을 관찰하여도 법을 함께 관찰할 수 있으며, 느낌과 마음의 관찰도 법관찰과 연결되어 있다.

법관찰은 간단히 말하면 대상과 부딪침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는 관념과 개념과 언어와 표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눈의 순수한 기능은 다만 색깔과 형상을 알뿐이지만, 눈으로 색깔과 형상을 보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좋고 싫은 마음을 붙여서 분별하게 된다. 이 때의 분별을 위파사나 수행자들은 관찰하는 것이다. 즉 감각기관 하나하나를 통하여 일어나는 분별의 관념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원래 법은 일정한 대상에 대하여 개념화되고 문자화되고 언어화되는 범주를 의미하므로 대상과 부딪침을 통한 6근의 활동 즉 12처를 포함하고 또한 이 법은 깨졌을 때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를 닦는 37조도품을 포함한다. 그래서 신·수·심·법의 4념처를 중심으로 관찰하는 위파사나 수행의 마지막에 법의 관찰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좌선 중에 신·수·심을 바르게 닦았는지 검증할 수 있는 것도 법관찰의 몫이다. 좌선 중에서는 대상과 부딪힐 일이 별로 없어서 관찰하기가 힘들지만, 실재의 생활에서는 오관과 의식에 모두 대상의 경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별의 마음을 관찰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좌선 중에 몸의 관찰이 완벽하게 된 사람이 실재로 몸의 공성을 획득한 상태가 되려면, 생활 속에서도 몸이 크게 상하게 되는 상황이나 몸의 괴로움을 만났을 때에 어떠한 개념도 생기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는 것에도 볼뿐 자기 식으로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지도 않으며, 귀로 소리를 들어도 들을 뿐 그 소리에 대하여 판단하여 싫고 좋은 관념을 붙이지 않으며 갖가지 냄새의 대상을 만나도 그냥 그 냄새를 맡을 뿐 그 냄새에 대하여 그 이상의 생각이 올라오지 않으며, 혀로 맛을 보아도 그 맛일 뿐이어야 한다.

법관찰은 몸·느낌·마음관찰이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 가능한 수행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이 분별이 일어나면 바로 크건 작건 간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앞의 수행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내가 대상을 보고 일으키는 마음들을 스스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낄 때마다 항상 분별하여 관념화하는 습관을 우리는 세세생생 해 왔기 때문에, 좌선 중의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번뇌를 어느 정도 제도하지 않으면 생활 속에서 대상과 부딪침으로 일어나는 12처를 관찰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행·주·좌·와 모든 행 속에서 개념과 언어의 훈습이 다 녹아 났을 때, 법은 묶임의 범주가 아니라 진리 그대로 다가오는 것이며, 우리의 분별은 하나가 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법은 불법이라고 해서 지혜로 보는 진리도 상징하고 있지만, 그 법은 범부 중생에게는 108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며, 생각 생각은 모두 번뇌의 법 아님이 없다.
이 일어나는 번뇌의 자리를 관찰하라.

그러면 그 속에 무상(無常)·고(苦)·공(空)을 알지니.

강명희 박사
위파사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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