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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취봉 스님 (1898년∼1983년)

기자명 권오영

송광사 복원의 일등공신

1983년 8월 6일 입적
49년 첫 주지 소임
조계총림 설립 주도



취봉 스님은 조계총림 송광사가 오늘날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송광사를 복원하겠다는 발원으로 몸소 탁발을 하며 정재를 모아 새롭게 도량을 중창하는가 하면 도제양성 기관인 조계총림 설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취봉 스님은 15세 되던 해 출가해 19세에 송광사 남호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듬해 호은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 했다.

1923년 송광사 강원에서 중등과를 수료한 취봉 스님은 송광사에서 세운 벌교 송명학교에서 교원으로 봉직하면서 ‘교육불사’에 전념했다. 이후 불교 교학을 모두 익히겠다는 포부를 세운 취봉 스님은 1939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41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오른 유학길이지만 스님은 일본 경도 임제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귀국 후 송광사 강원 강사로 취임한 스님은 이후 예산 정혜사와 용화사 도솔암에서 안거 정진할 때를 제외하곤 70년 가까이 송광사에서 줄곧 주석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후 빨치산과 토벌대간 쫓고 쫓기는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송광사를 지킨이가 당시 주지 소임을 맡은 취봉 스님이었다. 대부분의 송광사 대중들이 전쟁을 피해 송광사를 떠났지만 취봉 스님은 오직 전통가람을 지켜야겠다는 발원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를 사지(死地)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 같은 스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광사는 몇몇 전각을 제외하고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1000년 이상 전통가람이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자신의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스님은 자신의 손으로 송광사를 복원하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바랑하나 만을 메고 순천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찾으며 탁발에 나섰다. 이 같은 노력 끝에 1960년 1차로 대웅전 복원을 마무리지은 스님은 이후 설법전, 명부전, 응향각, 그리고 종각과 차안당 등을 차례로 복원했다.

스님의 송광사에 대한 애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63년, 1970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은 이후 송광사 초대 방장인 구산 스님과 힘을 모아 총림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일부 재적 대처승들의 거센 반발을 원만하게 처리한 스님은 결국 오늘과 같은 도제양성기관인 송광사 조계총림의 모습을 갖추게 했다. 이후 염불원 회주로 추대된 취봉 스님은 이때부터는 오직 수행자로서의 본분에만 전념했다. 90세 가까운 노구에도 아침, 저녁예불에 참가하는가하면 후학지도에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송광사 재건과 가람 수호를 위해 지극한 관심을 가졌던 취봉 스님은 1983년 8월 6일 세납 88세, 법납 70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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