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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왜 ‘정화’에 개입했을까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4.09.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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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식 교수, 「내일을 여는∼」서 분석

“불교 내부 요청 간과됐다”반론도 제기

<사진설명>이승만의 개입으로 '정화'는 비구승들의 승리로 결말을 맺는다. 사진은 60년 11월 비구승들의 거리 행진 장면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있어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손꼽히는 소위 ‘정화’.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으로 야기된 이 역사적 사건은 54년 5월부터 연이어 발표된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시로 인해 더욱 심화됐고, 결국 공권력을 등에 업은 비구승들의 승리로 결말을 맺게 된다. 그럼에도 ‘정화’가 끝난 이후 50여년이 지나도록 불교계에서는 ‘왜 이승만이 정교분리의 원칙에서 벗어나 불교내부 문제에 깊이 관여했는가’에 대해 아직까지 조명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왜 불교 정화에 관여했을까?

최근 부천대 김광식 교수는 역사 학술잡지인「내일을 여는 역사」(2004년 가을호)에 ‘이승만은 왜 불교계를 정비하였나’라는 글을 통해 이승만이 왜 ‘정화’에 관여했는지를 분석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이승만이 ‘정화’에 개입한 이유에 대해 이승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으며, 불교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신한 이승만은 한국불교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불교 내분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불교계의 위상을 급격히 하락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또 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독재체제를 정비한 이승만은 정치적인 모순을 불식시키기 위한 소재를 찾았고, 1953년부터 추진됐던 한일회담이 결렬되자 친일 청산의 명목으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대처승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반일의 화신으로 만들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방책을 구상한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분석은 대통령이 된 이후 사찰을 찾은 이승만은 어린애의 기저귀가 보이고, 승려의 아내가 사찰 안에서 동거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불교를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을 가지게 됐다는 것. 이런 가운데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이 발생하자 이를 절호의 기회로 이용, 이승만이 불교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유시를 발표했다는 것이 김광식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광식 교수의 주장과 달리 정작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는 주장들도 많다. 중앙대 강사 한동민 씨는 “이승만의 ‘정화’ 개입은 불교내부적 요청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범어사, 해인사 등을 찾은 이승만에 대해 일부 비구승들은 수 차례에 걸쳐 ‘정화’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비구·대처간의 갈등이 절정을 이루던 55년 송광사 구산 스님은 ‘정화’를 위해 공권력을 요청하는 혈서를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등 끊임없는 비구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견해는 ‘정화’에 대한 정당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반성과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책임론’으로 이어지고 있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한국국학진흥원 김순석 수석 연구원도 “물론 이승만이 기독교인이라는 점,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점도 전혀 없지 않겠지만 청담, 구산 스님 등이 직접 경무대를 찾아 공권력을 동원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불교 내부적인 요인이 더 크다”며 한 씨의 주장에 뜻을 같이 했다. 특히 그는 “이미 당시 종정이었던 만암 스님이 대처승들은 더 이상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급진 개혁적 비구승들은 공권력과 결탁해 폭력을 사용하는 등 비불교적 행태를 자행했다”며 “이승만의 불교문제 개입 논쟁에 앞서 이에 대한 불교 내부의 규명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화’는 전통불교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면 불교계의 주체성 상실, 폭력의 만연, 재가불교의 위상 약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끊이질 않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의 ‘정화’ 개입에 대한 원인은 물론 그 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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