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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을 혼란으로 보지 말라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4.09.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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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표준화 움직임을 보고

주로 중국이라는 필터를 통해 전해져온 우리 불교가 2천 년대에 들어서며 불교사상 최대의 불교 전래 루트(route)에 대한 일대 역추적(逆追跡)과 다양한 전통의 불교수행 편모(片貌)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전통불교 혼용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소승 불교 경전 원본과 비파샤나 수행법, 티베트식 진언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대승 밀교, 금강승 수행 등이 그것이다. 세계가 좁아지고, 우리 불자들의 활발해진 성지순례와 유학의 덕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만끽하면서도, 필자는 우리 천수경의 수행에는 우리식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작(作)탄트라 사다나(성취법)에 의한 티베트식 수행에는 불교 산스크리트 진언을, 각각 병행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학계에서 제시하는 서로 다른 원어(原語) 버전에도 불구하고 대다라니의 일방적 대체(代替)를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고유의 전통에 대한 존경과 보전도 아주 중요하며, 그 훼손을 막아야 된다는 점. 둘째, 팔리어에 가까운 프라크리타어가 섞인 부처님의 불교식 산스크리트어와는 별도로 발전 변모해온 인도, 네팔의 힌두 산스크리트어도 그들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 셋째,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설법은 언어의 종류나, 거리의 원근(遠近), 국경을 초월해 모든 불자들에게 각각의 고유의 언어로 전달되며, 잘 소화될 뿐 아니라 각각의 전통으로 다양하게 발전된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지난주 보도된 일부 학자단체들이 시안을 확정해, 내년 말부터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강제규정’이 마련될 예정”이라며, 우리 불교학자들과 연관단체들이 발표한 ‘불교용어표준화’작업의 결과는 경악(驚愕)이다.

첫째, 수많은 ‘부처님 말씀’들은 원음을 따르는 단일 표기의 표준어 속에 ‘통폐합’돼야할 문화 독재주의의 만만한 적(的)이 아니다. 불교는 외도들의 흔한 수행양태인 유일(唯一)체제에 맞추거나, 특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일사불란한 매스게임(集體)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大洋)는 아름다운 파랑(波浪)과 함께 끝없이 번지는 파도처럼, 변화무쌍한 불자들의 수행 방식과 보살행의 신변(神變)이, 가는 곳마다 자유롭게 펼쳐지는 곳이다.

새로이 ‘축소된’ 오직 하나의 표준어(?)를 위해, 다양한 수행전통 속에 꽃피고, 발전 보존돼온 우리 말, 또는 우리말이 돼버려, 1천6백여 년 동안 사용돼온 기존의 부처님 말씀이나 진언을 ‘싹쓸이’로 퇴출시키는 발표내용이 그대로 집행된다면 우리 불교 문화유산 전체의 ‘오버킬’(대량 학살)을 가져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둘째, 아주 쉬운 예로, 표준화 확정안에 채택된 새 용어의 발음법 ‘니르와나’, ‘쁘라기야’는 옥스퍼드, 웹스터, 랜덤하우스 등 권위를 인정받는 사전에서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반면, 이들이 갖다버리자는 ‘닐바나’와 ‘열반’, 그리고 ‘프라즈냐’와 ‘반야’는 모두 공식 발음으로 표기돼있다. 인도 망명정부에서 활동해온 달라이 라마나, 그의 티베트인 통역 담당자 툽텐 진파 박사 같은 사람들도 전통적 BHS불교식 발음 ‘프라즈냐’를 택하고 있다. ‘공존’을 혼란으로 보지 말자.

셋째, ‘불교용어’는 학술적 용어(terms)의 차원을 넘는다. 삼귀의(三歸依)의 첫 걸음마는 부처님 말씀인 법보(法寶)를 대할 때, 살아계신 부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일이다.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담겨있듯, 불교용어는 그 한 단어에도 “허공처럼 많은 무수한 수행자들과 부파에 의해 쌓아져온 전통과 교법(敎法)이 응축돼” 있다. 특히 진언(眞言)의 경우, 종자(種字) 한자 한자가 한분 또 한분의 부처님의 ‘삼매의 존재’(Samadhi-sattva)이시다. ‘밤’자 한자 뒤에는 무려 37존(尊)이 계시다. 일할일봉(一喝一棒)에 생사열반이 오락가락한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불교용어표준화는 백지화돼야한다.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도 끝나지 않은 산스크리트 표기 공방 시비에 불교학자들이 뒤늦게 뛰어들어 싸울 이유가 없다. 또 만에 하나, 자기 논문에 굳이 우리말을 젖히고 현지어 ‘원음표기를 강행’하겠다는 현학적인 불교학자가 혹시라도 나타난다면, 현행 국정 표기법을 준수케 하면 된다. 정상적인 우리나라 불자라면, 관세음보살님을 ‘아왈로끼떼슈와라’하고 부를 리는 만무하다. 함께 뛴 승가가 있다면, 자숙(自肅)을 권한다.

서병후
(금강승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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