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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이 온 몸에 퍼져 살아꿈틀거리게 하라

기자명 법보신문

보문사 금강경 산림법회 법문 대 진스님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一時). 불(佛).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여대비구중(與大比丘衆).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
“이와 같이 들리었다고 생각하세요. 먼 옛날의 어느 날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이며 보문사입니다. 천이백오십 비구들이 아닌 여러분입니다. 천이백오십 비구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있기에 기수급고독원은 빛이 났습니다. 바쁜 일상을 놓고 부처님 말씀(금강경)을 마주한 여러분이 있기에 보문사도 빛이 납니다.”

空과 空이 내는 묘음에 귀기울여라

순간 「금강경」은 시공을 초월해 우리 곁에 왔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으로 생생히 전해졌다. 이전에도 경전은 있었고 금강경이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의심 한 번 해본 적이 있었는가. 그럼에도 대진 스님의 조용한 일갈이 금강경을 새롭게 대하도록 이끌었다.

“진심으로 부처님 제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세요. 그리고 편안히 앉아 계십시오. 사량분별을 버리고, 온 몸의 세포를 열어두세요. 부처님도 텅 비어있고 수보리도 텅 비어 있습니다. 두 공(空)이 마주보며 묘음을 만들어 내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대진 스님은 대중 자신이 「금강경」을 해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설하는 「금강경」이 내가 보았던 금강경 해설서와는 다르다는 생각도, 어느 스님의 금강경 강좌와는 다르다는 생각도, 아니 세속의 그 어떤 일도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편안히 앉아 있어달라고 당부했다.

“금강경 어느 한 구절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금강경은 모순의 모순을 거듭하고 있으니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와 같습니다. 뒤에서 인 파도가 앞의 파도를 때로는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살리기를 반복하듯이 금강경 앞 구절은 다음 구절을 파괴하고는 다시 되살아나게 합니다. 이러한 역동성을 갖고 있는 경전은 금강경뿐입니다. 그러니 금강경의 핵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진 스님은 금강경으로부터 얻어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역설했다. “여러분은 금강경 앞에 무엇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대진 스님의 이 일갈은 금강경을 설해가며 조금씩 풀려갔다. “마음을 청정하게 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이 말은 방편의 소리일 뿐입니다. 마음을 닦아 탐진치를 끊는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에 깨달음의 씨앗이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는 한 탐진치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훼방꾼입니다. 마음이 없어야 탐진치가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무심(無心)이라 합니다. 일심이 아니라 무심이며 일념이 아니라 무념입니다.”
삼독을 끊어야 청정심을 보고 여래를 본다했거늘,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 않았는가! 금강경 한 쪽 한 쪽이 넘어가며 대진 스님의 선법문은 더욱 깊어만 갔다.

마음 있는 한 깨달음 없어

대진 스님은 ‘진여’라는 마음은 없다고 한다. 마음은 한결같지 않기에 여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여여하려면 마음이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너무도 마음에 집착하기에 ‘진여’라고 가설해 놓았는데 또다시 우리는 ‘진여’라는 말에 집착하니 ‘무심’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마음이 있는 한 깨달음은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간화선이든 위파사나든 어느 특정한 수행법이 깨달음을 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십시오. 수행중에 빛이 자신을 휘감았다고 해서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행 중에 아주 시원하고 날아가는듯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깨달음이 올 것이라 믿지 마십시오. 도인들이 만들어 낸 방편의 사슬에 걸려드는 겁니다.”

<사진설명>서울 보문사(주지 지범 스님)가 주관한 '대진 스님 초청 금강경 산림법회'는 9월 14일부터 20일까지 7일간 열렸다. 매일 3시간의 선법문에도 500여 대중은 뜨지 않고 경청했다.

깨달음 밀려오면 두려워 거부

대진 스님의 이 한마디는 곱씹어보아야 한다. 수행법에 집착하고는 안주해 버리는 병폐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을 한다고 해서 위파사나 수행자를 무조건 하등시 하고, 간화선은 송나라 때 나온 것이니 부처님 수행법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법을 공부하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라는 아만심에 사로잡혀 뭇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태 또한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바로 ‘수행법’이라는 것에 집착한데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기에 스님은 ‘조복’이라는 말도 쓰지 말라고 한다. 육체는 깨닫는데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굶어서 깨달음 얻는다면 우리는 수련을 통해 부처님보다 더 오래 굶을 수 있습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훈련을 통해 부처님이 앉아있던 시간보다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호흡이 길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훈련을 통해 부처님 보다 더 긴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방해하지 육체가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 깨달음을 원하고 있는가? 대진 스님은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은 깨달음이 밀려오면 뒤로 물러섭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깨달음을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떨궈버려야 하는데 과연 여러분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당장 여러분은 집착 하나 버리는 것에도 겁을 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마음에 안주하고 있을 뿐 무심하려 하지 않습니다.”

윤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윤회는 하는 것이니 다음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둘 것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윤회가 아닌 열반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진정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혹 단순한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선택한 믿음이기에 소란스럽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빈약하기만 하니 놓아야 합니다. 연못에 연꽃이 피어오르듯, 동산에 달이 떠오르듯 믿음은 순수하게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간절함이 있습니다. 믿음과 간절함이 극에 이르고 깨달음이 밀려오는 순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깨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금강경을 대한다면 금강경의 어느 한 구절이 여러분을 깨치게 할지 모릅니다.”

금강경에 절대진리가 있고 궁극의 진리가 있다고 해석하고 싶지만 그것도 ‘욕심’일 뿐이라고 한다. 집착을 버렸다고 하지만 부처님 법까지도 버리지 못한다면 그 또한 집착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봉착하는 것은 부처님 법일지 모릅니다. 부처님 법도 집착을 버리라는 방편입니다. 집착을 버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부처님 말씀을 듣고만 있는 것으로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금강경 앞에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금강경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금강경이 온 몸에 퍼져 살아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집착을 버리려는 행은 하지 않고 금강경을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사념을 잠시나마 접고 금강경을 대해 보자. 대진 스님의 일갈처럼 어느 한 구절이 우리를 변하게 할지 모를 일이다. 그 변화에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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