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기자명 법보신문
  • 포토
  • 입력 2004.10.04 08:00
  • 댓글 0

한글기원과 신미대사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 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스님.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