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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과 성냄도 부처님께 바치세요

기자명 법보신문

40년간 금강경 독송 수행 - 홍익대 김 원 수 교수

 남산의 철쭉꽃이 흐드러지던 68년 어느 봄날. 당시 스물다섯 청년이었던 홍익대 김원수(62) 교수는 집을 나섰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옷가지와 『금강경』 한 권. 지금의 고통스러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였건만 오직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가 못내 눈에 밟혔다.

영원한 스승 백성욱 박사

명문대학 출신에 훤출한 외모. 속 모르는 이들이야 뭔 걱정이 있겠냐고 부러워했지만 당시 그에게 삶은 마치 어깨 위에 큼지막한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듯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거기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온갖 번뇌와 망상들은 하루가 다르게 그를 황폐화 시켜갔다.
이런 김 교수가 향한 곳은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의 ‘백성목장’. 그곳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수행자였던 당대의 선지식 백성욱 박사가 머무르고 있었다. 김 교수는 그 분 밑에서 공부한다면 무엇인가 인생의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김 교수는 처음 백성목장의 생활은 무조건 견디고 참아야 하는 고행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전혀 달랐다. 점심 이후로는 먹지 않는다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의 규칙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분별을 버리려 노력하는 한편 부처님께 법문을 듣는다는 마음가짐으로 『금강경』을 수시로 독송했다. 특히 ‘오욕락을 부처님께 드리면 곧 열반이요, 번뇌를 부처님께 바치면 깨달음이 될 것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좋은 생각이나 나쁜 생각이나 모두 부처님께 바치려 애썼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해도 바뀌어갔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행동이나 말씀은 『금강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경전이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若是經典 所在之處 卽爲有佛)’는 옛 말씀처럼 선생님은 『금강경』을 부처님으로 여기셨습니다. 밖이 아니라 늘 마음을 들여다보셨고 언제나 부처님을 공경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보다 진한 참회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스승은 그런 김 교수에게 ‘업장이 태산 같은 줄 알아야 진정한 수도의 마음을 낼 수 있다’는 말을 조용히 들려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뇌는 잦아들고 마음에서는 행복감이 서서히 차올랐다. 무엇보다 『금강경』 독송과 염불이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소를 없애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는 불법의 요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매일 수천번씩 부처님께 감사

그러나 업장의 두터움 탓일까.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는 때면 자신을 탓하기보다 점차 스승을 원망하고 짜증내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김 교수는 이제 혼자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량생활을 정리하고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취직조차 어려웠다. 3년간의 도량생활로 인해 취직 적령기를 넘긴 탓이었다. 이른바‘백수생활’이 시작됐다. 2년 이상 집에서 밥만 축내다보니 주변의 눈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 김 교수에게 음식점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오고 그는 백 박사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왔다고 말씀드렸다. 그 때 스승은 한참을 관(觀)하더니 “식당일을 하라”는 게 아닌가. 김 교수는 스승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식당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보였던 일이 막상 해보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특히 주방장을 비롯한 직원들과의 관계가 늘 골치였다.

“선생님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요?”
“그럼, 하던 일을 계속해야지.”
야속하게도 스승은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것을 권했고, 그 뜻을 어길 수 없어 2년간 식당일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란 회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 차에 중학교 교사를 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스승의 뜻대로 이를 포기하고 또다시 장사에 매진했다. 그렇게 다시 1년…. 하지만 각종 번민은 눈덩이처럼 불었고 몸은 대나무처럼 야위어갔다. 그는 탈출구로서 대학원 입학에 모든 것을 걸었다. 대학원에만 합격하면 음식점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부처님 뜻이라고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스승이야 못내 아쉬워했지만 이로 인해 지금의 교수라는 직함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 때 왜 선생님은 식당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당시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사를 시킨 것이 아니라 장사를 통해 금강경을 실천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돈을 벌게 하려는 하신 것이 아니고, 베푸는 연습을 시키셨던 거지요. 다만 제 근기가 한 없이 부족했을 뿐이죠.”
김 교수는 68년 이후 지금까지 새벽 3시면 늘 일어나 『금강경』을 독송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름’의 가치를 없애고 분별심을 없애는 『금강경』이 처음에는 맹물과 같이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지만 독송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단다. 그리고 이제는 『금강경』만 펴 놓아도 머릿속까지 절로 맑아진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늘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려 애쓰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외는 것도 이미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사회복지 활동에도 적극 참여

“선생님은 늘 탐내는 마음이 지혜의 원천이고 성내는 마음이 자비나 지혜의 원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그 마음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모두 부처님께 바칠 때 그로 인해 내 지혜가 밝아지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지난 90년대 초 사재를 털어 도반들과 함께 고양시 원당에 바른법연구원을 설립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연구·실천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지난해 6월 바른법연구원이 사회복지법인이라는 공익단체로 거듭나면서 다양한 복지활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불법이란 번뇌를 바쳐 지혜가 되게 하고 생사의 용심을 바쳐 열반의 세계를 이룩하는 부처님 시봉 과정”이라고 강조하는 김 교수. 그의 해맑고 그윽한 미소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누님 같다던 어느 시인의 국화꽃을 닮은 듯 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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