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전이야말로 최고 명안종사”

기자명 법보신문

간경수행 30년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 진 스님

<사진설명>수진 스님은 교(敎)가 번뇌의 자리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라면 선(禪)은 그 가르침을 직접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경전에서는 한번 스치는 옷깃에도 숱한 전생의 인연이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인천(人天)의 스승’이라는 출가자의 길에 있어서야….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 스님. 지난 30여년 간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은 어쩌면 깨알 같이 많은 과거세부터 삭발염의 했던 납자였는지도 모른다. 스님의 고향은 연화산 옥천사 법당이 멀리 보이는 경남 고성의 한 작은 마을.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있기를 더 좋아했던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부모님께 출가의 뜻을 밝혔다. 저학년 때부터 출가하겠다는 아들의 말을 종종 들어온 터였지만 막상 출가선언을 들었을 때 부모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달래도보고 얼러도보고 눈물로 호소도 해보았지만 부모는 자식의 뜻을 꺾지 못했다. 마침내 1971년 봄, 소년은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그토록 꿈꾸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됐다.

초등학교 졸업 후 발심 출가

소년이 찾아간 곳은 부산 마하사. 당시 그곳에는 문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문성 스님은 일제 때 해인사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지사로 선과 교에도 두루 능통한 선지식이었다. 이런 스님이 소년을 한참 동안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의 스승 서응 스님이 환생했다”며 몹시 반가워했다. 세수로 고희를 훌쩍 넘긴 은사 문성 스님은 자신의 스승이자 어린 제자인 소년을 지극정성으로 지도했다. ‘수진’이라는 법명과 함께 『초발심자경문』도 직접 가르쳐 주었다. 수진 스님 또한 스승의 의도대로 마른 논이 단비를 빨아들이듯 무섭게 공부해 나갔다.
스님은 스승의 시봉을 맡으면서 사찰예법과 의식집전, 염불방법 등을 자연스레 익혀 나갔다. 뿐만 아니라 스님의 지시대로 매일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목청이 터져나가라 “관~세~음~보~살~”을 한 시간씩 부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문성 스님이 72년부터 종단의 감찰원장 소임을 맡게 되면서 수진 스님은 자연스럽게 향곡, 대휘, 고암, 지월, 월산, 월하 스님 등 많은 큰스님들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훗날 큰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심을 하게 됐고, 이를 위해 먼저 잠이라는 수마(睡魔)부터 극복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디짧은 삶에서 쉴 것 다 쉬고 잘 것 다 자가며 어느 세월에 깨달음을 얻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스님은 잠과 싸워 나갔다. 졸리면 허벅지를 꼬집고 그래도 졸리면 서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뜻을 세웠다고 수마가 그리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던가.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도록 꼬집어도 어느 틈엔가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면서도 조는 게 태반이었다. 주변 스님들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어린 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라도 수마를 이기겠다고 무섭게 다짐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머리는 무거워져만 갔고 귀는 멍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죽음의 고통도 이보다는 덜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 행여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스님은 그래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6개월…. 어느날 한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이제는 수마에 얽매어 살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 때부터였다. 신기하게도 하루에 2~3시간 자도 피곤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1주일 쯤 날을 새워도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 후로 30년이 넘은 지금껏 스님의 평균 수면 시간은 2~3시간에 불과할 정도로 적은 잠은 삶의 한 부분이 됐다.

목숨 건 수마와의 싸움

잠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어릴 때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덕인지 스님은 빠르게 간경(看經)의 세계로 나아갔다. 스님은 하나의 경전을 선택하면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다. 마치 입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몸이 읽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육체도 의식도 느껴짐이 없이 오로지 경전 구절만 성성하게 남아있는 상태를 경험하고는 했다. 또 경전을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선방에서 16안거 나기도

문성 스님에게서 3년간 간경공부의 토대를 다진 스님은 74년 범어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스님은 경전의 내용을 가급적 외우려했고 동시에 그 뜻을 깊이 관하려 했다. 3년간의 강원생활. 배워할 것은 많았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탓에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다시 해인사 강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스님은 『원각경』, 『대승기신론』, 『화엄경』 등을 깊이 배울 수 있었다. 강원을 다시 졸업한 후 어른 스님들의 강권에 못이겨 해인사 강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만 18세에 강원을 졸업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거니와 20세에 중강을 맡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주변에서는 공부가 많이 익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의 깊은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몇 개월간의 강사생활을 접고 다시 시작한 것이 ‘통방학인(通房學人)’의 길. 전국 각지의 대강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경전을 배우는 구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스님은 탄허, 관응, 운성, 운기, 우룡, 무비 스님 등 내노라하는 강백들을 찾아가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몇 년씩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 81년부터 84년까지는 금산사에서 열린 화엄학림에 참여해 방대한 양의 『화엄경청량소』를 한 문장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독파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렇듯 경의 깊은 세계에 침잠했던 수진 스님은 84년 여름부터는 언설이 끊긴 선의 세계로 향했다. 교가 번뇌의 자리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라면 선은 그 가르침을 직접 체화하는 과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잡은 화두는 ‘이뭣고’였다. 스님은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조사 삼아 자심반조(自心返照)해 나갔다. 90년초까지 스님은 그렇게 16안거를 내리 선방에서 지냈다. 그러면서 확신한 것이 비록 선과 교가 가는 길은 달라도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동일한 경계에 이른다는 점이었다. 이는 곧 서산대사가 ‘교란 말이 있는데서 말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선은 말이 없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밝힌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불 목표로 경전 읽어야

수진 스님이 해인사 강주 소임을 맡은 것은 지난 93년 봄부터다. 스님은 학인들을 가르치며 특히 강조한 것이 간경하는 마음가짐이다. 그저 생각없이, 혹은 복을 바라며 읽으면 그만큼의 가피는 있을지라도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경전이든 부처가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경전을 읽을 때 육근이 청정해지고 마침내 간경을 통해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스님의 말이다.
99년 봄 해인사 강주 소임을 마친 스님은 지난 몇 년전부터 부산에 해인정사를 건립하는 불사를 추진하며 동시에 대중포교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비록 자신의 공부가 늦어지더라도 대중들과 더불어 깨달음을 이뤄나아가는 게 바로 대승불교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다.
‘경전은 가장 위대한 명안종사(明眼宗師)’라고 강조하는 수진 스님. 낮달처럼 맑고 투명한 스님의 미소는 경전 속 천진불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