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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은 낮은 수행법인가요?

기자명 법보신문

분별심보다 중요한 것은 수행자세

Q. 염불을 낮춰 말하는 주변 분들의 소리를 듣다보면, 귀가 솔깃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A. 요즘 젊은이들의 말투를 관찰해보자면, “나는”이라는 말이 빈번히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자신을 내세우기는 해야겠는데, 손에 잡히듯 실감할 만큼 믿고 의지할 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익숙한 주변의 평가를 근거로 짜 맞춘 “나”를 억지로라도 강조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비록 많은 수행법이 있다고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이른다면 무아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한 채 무아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무아인 자신이 무아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실로 현상으로 나타난 자신의 존재는 실체가 따로 없습니다. 다만 무한한 관계성 속에서나 자신의 존재가 자리할 뿐입니다. 가족이나 직업 또는 나이 등과 같이 상대적인 것과 계속 관계하며 드러납니다.

오늘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는 누군가의 딸로 불리었듯이, 나이 들고나면 또 다른 누군가의 할머니가 됩니다. 막 입사한 신입사원은 조금 전까지 대학생이었지만, 세월이 가면 사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래부터 상대적으로 머물기만 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연에 따라 그렇게 불리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무아인 자신이 무아로 살라는 가르침의 참 뜻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착각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나는 본래부터 뭐야!”하며 외치는 소리에 귀가 멀 지경입니다. 이는 마치 스스로가 노예 되기를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른 사회적인 변화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눈치나 살피면서 넋 놓고 살려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삶은 그렇게 모독당할 만큼 하잘 것 없는 게 아닙니다.

우편번호가 바뀌었다고 그 집마저 바뀌지는 않습니다. 전화기를 교체한다고 해서 주인까지 교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이 그대로이고 주인이 그대로이듯이, 삶 그 자체가 바뀌지 않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뀐 것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거나 혹은 갖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단지 어떤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아무리 휘황찬란한 도구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생로병사와 같은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방법적인 추구의 결과에 의해서 행복해지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좋은 수행법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생명가치가 바뀌는 게 아닙니다. 오직 나로부터 말미암아야 합니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과 관계된 세상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염불이야말로 바로 그런 방법적인 차원이 아닌, 근원적인 수행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문사수법회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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