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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 좇는 마음이 온갖 괴로움의 시작”

기자명 법보신문

청빈과 강단의 수행자
안성 석남사 회주 정무 스님

거침없는 말투, 활달한 손동작, 소탈한 웃음. 거기에 수더분한 옷차림과 몇 년째 신고 있음직한 낡은 신발. 얼핏 보면 그저 소박하게 살아온 평범한 스님일 뿐이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안성 석남사 회주 정무(正無) 스님은 ‘큰스님’이기를 거부하는 ‘큰스님’이다. 그 흔한 승용차 한대 없이 평생을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세탁기 없이 손수 빨래를 한다. 계곡의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전통 해우소를 억척스레 고집하고, 연료비를 아끼려 낮에도 방바닥에 이불 깔아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 해우소에서 휴지 대신 물과 손을 이용해 ‘뒷물’을 하며, 세수가 70대 중반이건만 직접 해우소에서 똥을 치고 그것으로 배추와 무를 기르고 있다. 수십 명의 상좌가 있고 교구본사 주지를 십수 년이나 지냈던 스님의 이력이 오히려 무색할 뿐이다.

백장청규 정신 일관

“얼마 전 석남사에 갔었습니다. 정무 스님이 아흔은 됨직한 노스님을 모시고 있더군요. 본인이 노스님임에도 어찌나 그 분을 정성껏 모시던지 보는 사람이 다 감동할 정도였습니다.”(서울대 전재근 교수)

“제가 신계사 대웅전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큰스님 덕입니다. 70년대초 저를 보시고 나무 다루는 소질이 있으니 목수의 길을 가라고 하셨죠. 또 훌륭한 전각들을 많이 봐야한다며 여행경비도 두둑이 챙겨주셨지요. 그 고마움을 어찌 잊겠습니까.”(최현규 도편수)

“한 번은 술에 잔뜩 취한 젊은 관광객이 절에 들어와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주지 나오라고 고함을 버럭버럭 칩디다.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그 때 정무 스님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덥석 땅바닥에 삼배를 하며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젊은이도 갑작스런 상황에 오히려 무안해하며 슬며시 사라지더군요.”(용주사 사무장)

“옛날 용주사는 교통편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한 번 놓치면 몇 시간을 기다리기 일쑤였죠. 그럼에도 스님이 택시를 타는 것을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자신이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될 걸 가지고 삼보정재를 허투루 낭비해서야 되겠냐는 것이었죠.”(상좌 심경 스님)

이렇듯 많은 이들의 말처럼 스님의 삶은 ‘청빈’ ‘강단’ 그리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의 정신으로 일관된다. 그리고 이는 1958년 출가한 뒤 곧바로 온몸으로 배우고 익혔던 스승들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졸업 후 전강선사를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그 문하에서 오랫동안 참선수행을 했던 선승이자 탄허, 관응 스님 등 대강백으로부터 교학을 배운 학승이기도 하다.

“수행은 결국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도록 하는 게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기분이야 좋든 말든 기분 좋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정말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이야 어떻든지 건강하다 생각하고 생활하면 정말 건강해지지. 또 행복하든 말든 행복하다 생각하고 봉사하면 정말 행복해진다 이거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행도 불행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알아야해.”

정무 스님이 첫 주지 소임을 맡은 곳은 영주포교당으로 당시 불교계가 ‘정화(淨化)’문제로 불교계가 한참 혼란했던 1968년이었다. 영주포교당도 다른 대다수 사찰처럼 결혼한 스님이 절을 맡고 있었고 신도들도 그를 따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무 스님은 매일 새벽 4시면 한 시간 가량 영주 시내를 돌며 염불을 했고, 절로 돌아오면 마치 목석이나 된 듯 그저 참선만 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자 신도들은 스님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실제적인 주지 소임을 맡게 되면서 스님은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리와 수행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그저 복만 비는 것으로는 불교의 미래가 암담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님이 수행과 법문 중심으로 2박3일간 실시했던 정진 프로그램은 불교 수련회의 효시로 교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스님이 은사 전강선사의 뜻에 따라 용주사 주지를 맡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용주사는 말이 교구본사였지 퇴락할 대로 퇴락해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조차 언제 무너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스님은 장기적인 불사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갔다. 그렇다고 신도들에게 불사를 강요하거나 돈 많은 불자의 도움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많은 보시금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적은 돈이라도 많은 사람이 보시할 수 있도록 유도했으며, 누구나 부담 없이 보시금을 내고 초파일 연등을 달 수 있도록 ‘봉축 시주함’을 만들었다. 지나치게 돈을 강조하다보면 출가수행자가 장사꾼으로 전락한다는 스님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퇴락한 용주사 재건

정무 스님은 이러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사찰을 재건해 나갔다. 용주사사적비를 세우는 한편 대웅전, 지장전, 요사채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일주문도 세웠다. 또 정부 소유로 있던 6만평의 땅을 이양 받음으로써 용주사의 기틀을 확립하기도 했다. 특히 이런 외적인 불사 외에도 스님은 이 곳이 정조대왕의 깊은 효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 용주사를 ‘효심의 본찰’로 만들려 했다. 스님이 경내에 큼직한 부모은중경탑을 세운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님 자신이 지극한 효자이기도 했다.

상좌스님들에 따르면 절에 어머니를 모셨던 스님은 단 한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행여 어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게 있다고 하면 스님이 직접 먹거리를 마련해 봉양하고, 편찮으실 때면 약재를 구해와 손수 다려드렸다. 스님의 어머니 또한 신심이 지극해 아들이기에 앞서 늘 스님으로 대해 예의를 잃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는 미리 갈 날을 주변에 알리고 목욕재계한 후 잠들 듯 고요히 삶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우리는 은혜 속에 태어나 은혜 속에 살다가지.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이웃의 은혜, 자연의 은혜, 국가의 은혜가 다 그런 거야. 하지만 이 중에서도 부모의 은혜가 근본이야. 부모의 은혜를 정말 안다면 천지만물의 은혜를 알게 되고, 또 천지만물의 은혜를 알게 되면 물건이든 시간이든 하나도 낭비할 수 없게 돼있어. 『부모은중경』의 10가지 은혜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이유고, 거꾸로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야 할 10가지 의무이기도 해.”

83년 용주사 주지소임을 마친 스님은 신륵사, 영월암 등 주지를 역임한 후 지난 2000년에 석남사로 옮겨왔다. 스님이 이곳에 온 뒤 상좌들과 직접 밭을 일구는 틈틈이 가건물을 모두 허물었다. 절은 수행도량으로서의 면모와 품위가 있어야 함에도 쉽게 지은 가건물들이 오히려 절을 절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방마다 딸려 있는 수세식화장실을 모두 없애고 전통 해우소를 만들어 대중들이 그곳을 이용하도록 했다. ‘편리함을 좇는 마음이 가장 큰 수행의 걸림돌이자 불행의 시작’이라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지난 여름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스님이 요즘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죽음의 문제다. 삶이란 태어나는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죽음을 향해 한 걸음 씩 내딛는 존재이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세상 올 때에는 정신없이 왔다마는 갈 때는 분명하구나. 아미타불 극락세계 나의 고향이로다. 나그네 세상 즐겁게 살다 가노라.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자신의 유언이 어떠냐며 활짝 웃어 보이는 정무 스님. 맑고 환한 스님의 노안이 서산마애삼존불의 상호를 쏙 빼닮았다.
안성=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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