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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석굴암 주실 지붕구조에 대하여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5.01.10 09:00
  • 댓글 0

‘3중 기와공법’, 방수 고려한 선인의 지혜

미술사학자 성낙주 씨는 최근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 관련 엽서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조선경주동양헌(게이슈 도요겐)’에서 1912년 경 석굴암 내·외부 모습을 촬영한 사진첩『신라고적석굴암석불』을 입수, 본지에 공개했다. 특히 이 사진첩에 수록된 ‘석굴암 입구’라는 제목의 사진은 그 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석굴암 지붕 구조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본지는 성낙주 씨가 공개한 석굴암 입구 사진과 그의 주장을 특집으로 게재한다. 편집자

알다시피 석굴암은 해발 500여 미터의 산중, 그것도 동해 바다에 면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창건 이래 1000여 년 동안 각종 자연의 횡포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사진설명〉 사진첩 『신라고적 석굴암석불』중의 ‘석굴암 입구’사진. 천개석 위로 기와 3층 구조가 드러나 있다.

해풍(海風)과 골바람은 물론 안개와 눈비, 그것들로 인한 습기, 또 동절기의 동파 및 짐승들의 침입에 항상적으로 시달려 왔던 것이다. 예컨대 1962년도 토함산의 기상자료에 따르면, 강우일수 134일, 강설일수 40일, 안개일수 123일, 결빙일수 110일 등 연중 멀쩡한 날이 드물었다. 신라인들은 입지선정단계에서부터 그 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방책 마련에 고심을 거듭했을 것이다.

짐작컨대, 전실 부분은 큰 논란이 없이 합의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과 상식에 따라 목조한옥을 가구하면 악천후로부터의 훼손과 짐승의 침탈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실의 경우에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지붕이 아시아대륙을 통틀어 일찍이 한번도 시도조차 된 적이 없는 순전히 석재들로 이루어진 초유의 돔 양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108개의 석재 틈새를 타고 주실 내부로 침투하는 빗물과 눈 녹은 물을 차단하고, 또 혹한기에는 실내의 온도를 유지하는 일은 인공의 석굴식 법당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 짓는 결정적인 문제였다. 특단의 대책이 필수적이었는데. 신라인들은 그 난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동안 석굴암 주실의 지붕구조는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자료부족이 가장 큰 원인인데, 예를 들어 <사진1>과 같이 20세기 초의 석굴암 정면 사진들은 대부분 천개석 위쪽의 실상을 알 길이 없었다. <사진2>는 일제가 1913년도 전면적인 해체에 들어가면서 촬영한 것으로, 거의 유일하게 천개석 위쪽의 모습이 보이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유의미한 정보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 점에서 <사진3>은 매우 희귀한 자료였다. 주실 지붕 겉에 기와지붕이 마치 고깔처럼 덮여 있었음이 명쾌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실의 지붕구조는 석조 돔에다 흙과 진흙을 두텁게 덮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씌워놓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사진3〉 1910년경 석굴암 주실의 기와 지붕모습.
〈사진1〉 20세기 초 석굴암의 정면사진.
〈사진2〉 1913년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보수하기 전의 모습.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이번에 필자가 구한 사진첩 <신라고적 석굴암석불>2호 중의 <사진4>는 실로 막중한 의의를 갖는다. 천개석과 기와지붕 사이로 훤히 드러난 두터운 토층(土層)을 통해, 선인들이 그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약여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붕 전면부가 함몰되면서 기왓장들과 흙더미가 흘러내려 그 단면(斷面)이 흡사 시루떡을 잘라놓은 듯한데, 그 중간쯤을 일렬로 치달리고 있는 기왓장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로, 토층 중간에도 기와지붕이 한 겹 시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개석 부분을 세밀히 관찰하면, 흙더미에 묻힌 그대로 천개석에 엎어져 있는 수키와의 끝부분들이 드문드문 비친다. 위에서 밀려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토층을 덮기 전에 석조 돔 지붕 전체를 통째로 덮었던 기와지붕의 잔편들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직 확언할 단계는 아니나 지금까지의 인식과 달리 석조 지붕 위에는 모두 세 겹의 기와지붕이 시설되어 있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만약 석조 지붕에 직접 흙을 덮는다면 불가불 그 틈새로 흙모래나 먼지 같은 오물이 내부로 스며들 터이고, 그럴 때 조각상들이 입을 심대한 타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

정리하면, 석굴암 주실의 석조 돔 지붕 위에는 세 겹의 기와지붕과 두 겹의 토석층을 번갈아 시설했다. 그것은 빗물 등의 누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은 물론, 겨울철에는 주실 내의 보온기능을, 겸하여 지진 등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등 다목적효과를 기대한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석굴암 주실의 지붕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완벽하게 축조되었던 것이다. 물론 창건 이후 퇴락과 중수를 반복했을 터이므로, <사진4>의 모습이 신라시대의 구조 그대로라고는 단언하지 못한다. 하지만 중수가 있었더라도 전래의 고식(古式)을 따랐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조선시대의 시(詩) 중에 석굴암의 외관을 고분(古墳) 형상으로 묘사한 것이 있어, 맨 위의 기와지붕에 다시 흙이 덮여 있었는지는 앞으로 엄밀하게 고구해야 할 과제이다.

아무튼 위의 사실은 수십 년 동안 이른바 석굴암 원형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현 목조전실의 존폐 문제와도 직결된다. 전실에 보호시설이 없다면 주실 앞쪽의 기와지붕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그 처마 끝에서 비도의 아치형 지붕과 전실 바닥으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밝혀진 주실의 세 겹 기와지붕은 처음부터 목조전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우수를 외곽으로 돌리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실 내부로 혹여 물 한 방울이라도 스며들까 노심초사한 신라건축가들이, 전실과 비도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 두었다는 것은 궤변이다. 오히려 온갖 묘책을 다 동원해, 현재의 목조한옥보다 훨씬 튼실하고 장려한 지선지미의 보호시설을 가설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학계 일각의 목조전실 철거론이 얼마나 허망한 혹세무민인지를 새삼 일깨운다는 점에서도 <사진4>의 사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현재 석굴암 주실은 원통형의 외벽 및 돔형의 지붕 전체가 흉물스럽게도 이중의 콘크리트 두겁에 덮여 있다. 1차 두겁은 일제 하의 보수공사에서 전래의 지붕구조를 무시한 채 온통 시멘트로 싸맨 것이고, 2차 두겁은 1차 두겁으로 인한 누수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로 1960년대에 재차 시설한 것이다. 그것들의 해체는 석굴암의 원형 복원에서 최우선 과제이나, 유감스럽지만 조각상들의 훼손 우려가 사라질 때까지는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는 막상 그것들을 제거한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주실 지붕구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들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이른바 원형론자들 역시 목소리만 높였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우리 학계의 현주소인데, 오늘의 시점에서 취해야 할 우리의 태도는 장차 두겁들이 철거될 때를 대비한 새로운 자료발굴과 연구에 매진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석굴암의 원상이 회복되기를 고대하면서 그 날을 위해 <사진4>에서 확인된, 곧 3중의 기와지붕과 2중의 토층으로 구성된, 옛 선인들의 정성과 지혜가 갈무리된 전래의 지붕구조를 하나의 시안으로 제시한다. 석굴암을 사랑하는 눈 밝은 이들의 깊은 관심과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미술사학자 성낙주 chakrab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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