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하는 사람’과 미륵반가사유상

기자명 법보신문
로댕의 ‘개혁’과 신라의 ‘무아’는

대립 개념 넘어선 조화의 두 요소


프랑스의 로댕(Rodin)(1840-1917)의 조각인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과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을 한번 간략히 비교해 보자. 로댕의 조각은 오른 손으로 턱을 받쳐 있으면서 우수에 젖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사람이 대단한 근육질의 사나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사진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대개 사색하는 사람은 근육질이 아닌데, 왜 로댕은 저 ‘생각하는 사람’을 그토록 근육으로 우람하게 조각했을까?

빠리에서 로댕의 조각품들을 보면서 그가 인간정신의 다양한 내면세계를 몸의 현상으로 드러낸 대단한 대가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의 울퉁불퉁한 근육의 젊은 몸도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지옥의 문’이라는 다른 작품에서 지옥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으로 축상화되어 다시 사용되었다. 지옥같은 세상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깊은 고뇌로 생각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로댕의 연구자인 따양디에(Taillandier)의 책을 읽고서 그런 심증이 더욱 와 닿았다. 로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존경받던 사회주의자인 쟝 조래스(1859~1914)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를 혁파하려는 의지에 불탄 젊은이의 모습임에 틀림없겠다. 근육은 그런 능동적 의식을 반영하는 표현이겠다.

그런데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전혀 그런 근육이 없는 민민한 몸으로 반가부좌의 모습으로 얼굴에 심각한 우수도 없이 엷은 미소를 띠면서 깊은 삼매의 선정에 들어 있는 자태다. 근육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을 뜯어 바꾸겠다는 그런 혁명적 의지의 부재를 상징한다 하겠다.

그래서 얼굴의 표정도 전투적이지 않고 고뇌적이지도 않다. 근육이 안보인다는 것은 자의식의 긴장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외부의 저항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의 인간이 아님을 뜻한다 하겠다.

로댕의 조각은 지옥같은 세상을 하시하나 신라의 사유상은 바깥을 보지 않는다. 무아의 상태에서 마음의 환희를 맛보는 그런 모습이다. 로댕의 것은 ‘내가 생각한다’(cogito)이나, 신라의 것은 무심에서 ‘반야가 사유한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로댕의 것은 자아의 사유, 만듦의 사유, 저항과 노력의 의지를 반영하나, 신라의 것은 무아의 사유, 무위의 사유, 세상을 놓아 버리는 사유를 머금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능위적인 사유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고 믿었다. 능위적인 사유는 세상을 사회도덕적으로 정의롭게 뜯어 고치기와 경제기술적으로 세상에서부터 이익을 옭아 내기의 두가지로 대별된다. 이 둘이 그동안 서로 궁합이 안좋았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정의롭게 한다고 뜯어 고친 세상은 늘 구악을 몰아내면서 신악을 몰고 왔고, 경제기술적으로 편리해진 세상은 인간본성과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만든 능위적인 약은 독성이 있어서 늘 그 약에 의하여 인간이 불행해졌다. 인간의 의지와 지능이 만든 능위적인 약이 곧 독임을 이제야 인간들이 서서히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선의지로 뜯어 고치거나 지능적으로 옭아내려는 철학이 세상에 행복과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음을 이제야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교적인 사유가 동서양에서 다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다.

인간은 이제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능위적 사유에 젖은 사람들에게 가히 충격적이리라. 그러나 웰빙(well-being)의 길은 거기에 있다. 이것을 앞으로 밝혀 나가겠다. 중생의 의지는 다 편파적(partial)이고, 지성은 다 부분적(partial)이다. 영어로 둘 다 같다. 중생의 이성도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과 교수
kihyhy@aks.ac.kr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