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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공간 필요한 한국사회

기자명 법보신문
최소한의 사색공간은 본성의 보호막
인공으로 가득찬 삶 ‘여래태장’상실


생활공간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홀(Hall)은 인간이나 동물이 집단생활을 하기 위하여 비누방울과 같은 빈 공간이 최소한도로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비누방울은 개체를 둘러 싸고 있는 최소 보호막을 뜻한다. 그 비누방울의 공간 크기는 각 민족이나 각 동물에 따라 다른데, 좌우간 그것이 찢어지면 인간이나 동물이 미쳐 날뛰면서 공격적이거나 자해적인 행동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생물의 존재양식을 가능케 하는 비누방울의 공간은 죽음의 무(無)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를 가능케 하는 터전이다.

한국사회가 지금 도덕적 가치관의 전도와 혼미현상을 겪고 있다. 이것을 보고 식자들은 언필칭 도덕 재무장을 역설한다. 도덕적 가치관이 물질적 가치관을 밀어내고 인간의 의식을 점유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 당위적 도덕론이 별로 효과가 없겠다. 지금까지 당위론적 도덕주의의 주장 강도에 비하여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동물에게 본능과 본성은 일치한다. 동물이 자기 생활공간으로서의 비누방울이 파괴되는 경우에 그는 본능적인 자위행위를 발동하든지 아니면 변태적으로 도망간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본능과 본성이 같은 마음 자리에 있으면서 달리 표현된다. 말하자면 그 두가지가 동거하고 있으면서 분리되어 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인간의 마음은 동물적인 자위적 본능이 발동하여 공격적으로 변하든지, 아니면 강자에 대한 굴종의 종속관계를 맺는다. 인간의 자기 비누방울이 찢어지는 경우에 본성이 꽃피지 못하고 본능의 자발성이 그냥 튀어 오른다. 이처럼 무의 빈 공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의 자발성을 활동케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적어도 홀이 말한 비누방울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본성의 잠을 깨게 하는 최소한도의 자연스런 빈 공간이다. 생활공간에서 빈 터전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서로 상대방의 비누방울을 침범하게 되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을 내고 타인들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으로 마음이 변하면서 이기심의 집착을 강하게 띤다. 어느 대학에 특강 차 갔었는데 교정이 온통 학생들과 자동차들과 건물들로 꽉 찼었다. 사색과 혼자 있기와 독서를 위한 빈 터전이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어찌 본성의 여유가 생길 수 있겠는가?

좁은 생활공간에서 우글거리며 사는 사회일수록 본성의 자발성보다 본능의 자발성이 더 강렬하게 요구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의 법칙은 늘 도덕의 법칙을 능가한다. 그래서 도덕이 반자연적 당위의 요구를 힘주어 말하면 할수록 그 도덕은 실패한다. 본능의 자연법칙이 가열차게 사회를 석권하면 할수록 인간은 조건반사적으로 도덕의식을 외친다. 그러나 그런 외침은 늘 빛좋은 개살구에 그칠 뿐이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항다반사로 되풀이했다. 어떤 사회적 수고도 자연성을 이길 수 없다. 자연성이란 마음의 자발성을 말한다.

우리는 지금 모든 점에서 본능이 발광하는 이기적 생존의 아수라 시대를 살고 있다. 당위적 도덕 언설이 여기에 먹혀 들지 않는다. 정치이념적, 사회계층적, 종교적, 지역적, 성별적, 문명-생태적 아수라의 갈등시대를 지내고 있다. 본능은 살기 위하여 소유하거나 지배되거나 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단말마적 전쟁이 있을 뿐이다.

본능의 자발성에서 본성의 자발성으로 마음자리가 옮겨져야 한다. 그것은 도덕설교로 안된다. 바깥에 무의 빈 공간을 생활터전으로 하는 문명의 구조를 많이 두어야 한다. 빈 하늘, 빈 땅, 빈 바다를 인공의 것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곧 발전이라는 허상을 버려야 한다. 무의 빈 곳은 우리 모두의 존재를 여여하게 존재하도록 보호해 주는 비누방울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태어나게 하는 여래태장(如來胎藏)이기도 하다. 무의 빈 곳이 살아 있어야 마음의 빈 터전도 따라 움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교수
kihyhy@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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