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여년 자비행-인술 신 문 웅 원장

기자명 법보신문

내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환자 마음병까지 낫게 하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인술인, 영주지역의 명의, 버거시병의 권위자, 독거노인들의 아들, 수행하는 포교사 등….

경북 영주에서 40여년 넘게 한약방을 운영했던 제광 신문웅(66) 원장을 이르는 말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폐쇄성 혈전 혈관염으로 손발을 절단해야 한다던 중병환자를 치료하는가 하면 오랜 고질병도 그의 손이 닿으면 씻은 듯 낫고는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20여 년간 매년 소년소녀가장이나 외로운 노인들 500여명에게 무료 투약을 하고 있으며, 연말이면 수천포기의 배추김치를 담궈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매년 1~2차례씩 성대한 노인잔치를 열고 있으며, 500~600명의 지역 노인들에게 효도관광을 정기적으로 시켜드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신 원장의 자비행과 인술이 알려지면서 영주시 시민대상을 비롯해 보건복지부장관상, 문화관광부장관상 등이 주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 원장은 불교 유치원 건립을 주도해 15년 간 원장으로 있으며 아이들에게 불심을 불어넣어 준 포교사이자, 매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참선과 주력 정진으로 하루를 여는 수행자이기도 하다.

독거노인-소년가장들의 ‘가족’

한약과 함께 50여년의 세월을 살아온 신 원장. 그는 자신이 의료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을 운명이라 믿는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그는 1948년 여름 아홉 살 어린나이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맞닥뜨려야 했다. 전국을 휩쓸던 장티푸스가 부모님을 한꺼번에 앗아간 것이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늘 주변 사람들을 돕던 선한 분들. 한 낮의 고된 농촌일과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세상의 전부라 여겨왔던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를 비롯해 졸지에 고아가 된 사남매는 절망했다.

이런 와중에도 8년 터울의 형은 남겨진 유산을 기반으로 동생들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애썼다. 그러나 형도 삶의 버거운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탓일까. 성실했던 형은 스무 살을 넘기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나중에는 노름에 빠졌다. 이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조차 모두 탕진하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결국 살 길을 찾던 남매들은 뿔뿔이 흩어져 친척집에 맡겨지게 됐고, 열다섯의 신 원장도 고향을 떠나 영주에 살던 외삼촌에게 의탁하게 됐다. 온갖 고난이 끊이질 않고 거기에 몸까지 허약하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삶과 죽음의 문제에 깊이 젖어들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 걸까?’ ‘병은 어째서 생기는 건가?’

이런 고민들은 그를 조숙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한약방을 운영하던 외숙부를 지켜보며 병을 고치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외삼촌의 허락을 얻어 한약방에서 막상 일은 시작했지만 그를 지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잔일을 하는 틈틈이 어깨너머로 약초의 이름과 효능을 익혀나가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외삼촌은 그에게 일을 맡기는 때가 늘어났고, 묘하게도 그가 조제하는 약이 큰 효험을 발휘해 단골고객이 생기기도 했다.

매일 새벽 참선-진언 수행

1963년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다음해 한약방을 개원했다. 마침내 자립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환자들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치료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는 앉으나 서나 혼자 있을 때나 남과 이야기 할 때에도, 심지어 꿈에서조차 약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남들이야 유능한 한약업사라고 칭찬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신 원장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한약방 운영이 아니라 배움에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한약방을 일단 접은 신 원장은 방주혁, 권중한 선생 등 당대 한의학의 대가들을 찾아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은 그는 최선을 다해 일하며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다.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수년 간 다시 공부한 끝에 그가 체득한 한의학의 요체는 ‘자비’와 ‘정성’ 두 단어였다.

의술의 요체는 자비와 정성

70년대 초 영주에 다시 한약방을 연 신 원장은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병을 치료하려 최선을 다했다. 또 당시 육자진언 수행을 하던 누나의 영향을 받아 진언수행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새벽 3시면 일어나 옴마니반메훔을 일심으로 염송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치료할 수 있음도 알게 됐다.

신 원장의 한약방은 곧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그는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이자 ‘대중에 회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홀로 사는 노인들과 아이들의 건강을 보살피면서 이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渠是我)’라는 서산대사의 말씀을 우연히 접한 후로 노인들이 곧 미래의 나이자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일 수 있다는데 생각이 이르렀다. 신 원장은 그 때부터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90년 어린이 포교를 위한 진각유치원이 개설된 이후에는 어린이와 노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대대적인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그가 영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난해 10월 말 서울 신설동에 이무엇고 한약방을 열었다. 여기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하다 가야겠다는 자각에서였고, 그 도전의 장소로 서울을 선택한 것이다. 신 원장은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따르듯 도시의 화려함 뒤에 소외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서울은 배움의 장소이자 회향의 자리이며 새롭게 마음을 닦아나갈 신성한 도량인 것이다. 서울에 자리 잡으면서 신 원장이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복지관 의료봉사를 비롯해 동대문구청에서 200여 명의 소년소녀가장 및 독거노인들을 소개받아 돕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그의 원력과 무관하지 않다.

4년 전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뭣고 화두수행을 시작해 지금은 그 즐거움에 흠뻑 젖어 산다는 신 원장. 세상살이에 지칠대로 지친 이들의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함께 보듬고 감싸주려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한껏 묻어나왔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