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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캄보디아 대학살의 은폐된 진실

기자명 법보신문

역사 왜곡으로
두 번 죽은
통곡의 땅! 킬링필드

<사진설명>맨위 사진은 미군이 남긴 불발탄 앞에서 노는 캄보디아 어린이들. 미국이 저지른 ‘킬링필드’를 증언하는 불발탄은 캄보디아 곳곳에서 아직도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인도주의 폭격’(humanitarian bomb ardment)이란 말이 있었다. 이 얼토당토 않는 말은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미군과 나토(NATO)가 세르비아계를 공격할 때 만들어낸 신조어다.

당시 토니 불레어 영국 총리는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 주민 50만명을 학살했다”며 전쟁몰이를 했다. 그러나 종전 뒤, 밀로세비치 유고 전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ICTFY) 법정에 세웠지만 그 ‘50만명 학살설’은 결코 거론된 적도 없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차 대학살은 미국이 자행

캄보디아 땅을 밟으면 늘 이런 역겨운 역사가 떠오르곤 한다. ‘킬링필드’로 익히 알려진 캄보디아의 왜곡 당한 역사가 겹쳐지는 탓이다. 현대사에서 이 ‘킬링필드’와 같은 거짓말투성이는 결코 흔치 않다. 아직도 생존자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살아있는 기껏 30년 전 일이 이미 전설로 굳어져버린 킬링필드의 정체는 대게 이렇다.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공산당 정부가 1979년까지 모두 2백만명에 이르는 시민을 학살했다.’

거짓말이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더욱이 캄보디아에서도 이런 ‘거짓말’을 역사라고 가르쳐 왔다.

진실을 말해보자.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미국이 먼저 저질렀다. 1969∼1973년 사이에 미국은 북베트남군 보급로와 게릴라 기지를 차단하겠다며 중립국 캄보디아에 불법 폭격을 감행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B-52전략폭격기를 동원해 무려 53만9129톤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캄보디아에 퍼부었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총량 16만톤을 3배나 웃돌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대 ‘융단폭격’이라 부르는 한국전쟁 38개월 동안 미군이 사용했던 모든 폭탄과 포탄을 합친 49만5000톤마저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결과, 베트남전쟁과 상관없는 캄보디아 양민 60만∼80만명이 살해당했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 부른다면, 이른바 ‘크메르루즈’로 잘 알려진 민주캄푸치아 집권기인 1975∼1979년 사이에 사망한 약 80만∼100만명을 ‘제2기 킬링필드’로 부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크메르루즈가 저지른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사이에 약 140만∼180만명에 이르는 시민이 살해당했다.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다.

그런데도 미국이 제작하고 미국이 살포한 캄보디아 현대사, 그 킬링필드는 모조리 크메르루즈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놓았다. 또 하나, 크메르루즈가 살해했다는 그 제2기 킬링필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혁명에 성공한 민주캄푸치아정권은 미국의 괴뢰정권 론놀에 부역했던 이들 10여만명을 처형했고, 일반 시민들을 강제노동으로 사망케도 했다. 그러나 그 제2기 킬링필드 희생자 수치에는 기아, 질병과 같은 사회적 조건으로 사망한 이들과 또 자연적인 사망자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은 크메르루즈정권만 탓할 수가 없다. 그 무렵, 유엔과 국제구호단체들의 대 캄보디아 지원을 미국 정부가 차단해버려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누가 살해했건, ‘킬링필드’는 분명한 역사다. 또 그 가해자들을 모두 밝혀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사는 그 모든 킬링필드 책임을 모조리 크메르루즈에게 덮어 씌웠다. 자, 이래도 온당한 역사라 부를 수 있을까?

과거사… 정치적 도구로 전락

이렇게 굳어져버린 그 킬링필드를 놓고 1999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실랑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 한번 열어 보지 못한 채 6년 가까운 세월만 흘러버렸다. 그 과정에서 결국 미국이 저지른 제1기 킬링필드인 1969∼1973년 기간을 제외한 채, 오직 크메르루즈 집권기간인 1975∼1979년만을 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건 그야말로 역사를 두 번 죽이는 정치적 흥정이었고 음모였다.

말하자면, 올 8월쯤 열릴 것으로 보이는 국제재판을 통해 나라 안팎으로부터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총리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뒤 켕기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미국 속셈이 어우러진 무대가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캄보디아 사회에서는 킬링필드 희생자 유골을 놓고 ‘말싸움’을 벌여왔다.

시하누크 전 국왕 같은 이들은 “유골들을 화장해서 영혼이나마 편히 잠들도록 해야한다”며 지천에 깔린 유골들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화장해서 킬링필드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훈센 총리 같은 이들은 “천만에! 유골들을 영구보존해서 킬링필드 역사를 후세에 전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여왔다. 캄보디아 정치판에서 누구도 그 킬링필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과거 행적을 놓고 본다면, ‘유골논쟁’이 정치적 계산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사진.상>‘유골논쟁’의 두 축인 시아누크 전 국왕과 훈센 총리.
<사진.하> 킬링필드 현장 청엑에서 출토된 시민들의 유골. 유골 처리 문제는 킬링필드의 또 다른 진통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 정치적인 ‘유골논쟁’에 영혼을 다루는 주인공들인 불교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칸다르의 떳삼우언 스님은 “유골들을 전시한다는 건 폭력적인 문화를 조장하는 꼴이고,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며 시하누크왕의 뒤를 받쳤다. 그런가 하면, 프놈펜의 노완니 스님은 “불교 교리에서는 화장이든 매장이든 강조한 적도 없고, 또 그런 절차 없으면 환생하지 못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다”며 보존론자 훈센 총리를 지원했다.
그러나 정작, 1천만 캄보디아 불교도들은 정치에 휘둘리는 불교에 지쳐버린 모양새다.


스님들 정치판 기웃… 비판 자초

“스님들마다 말이 다르고, 날마다 말들이 바뀌는 판이니…이젠 그런 데 관심도 없다.”
은행원 소피압의 비웃음 속에서 캄보디아 불교는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언론인이자 킬링필드 연구자인 푸끼아는 “불교계마저 유골을 놓고 이익만 계산 할 뿐, 진정성이 없다”며 정치판을 쫓는 불교, 정치판을 흉내내는 불교를 거세게 비난했다.

시민들에게 외면 당하는 불교

“캄보디아 불교는 학살에서도 그 수습에서도 모두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푸끼아의 말마따나, 정치를 매질하고 사람과 영혼을 다루어야 할 불교는 미국의 학살에서도 또 크메르루즈의 학살에서도 모두 입을 다물었던 장본인이다. 그리고 이제 그 해결을 놓고도 공염불만 하고 있는 꼴이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수습하고 사회통합을 이끌어야 할 불교가, 그리하여 올바른 역사를 세우는데 봉사해야할 불교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캄보디아 땅에 어둑한 땅거미가 지고 있다. 시민이 떠나버린 불교, 그 캄보디아 불교는 앙코르와트의 영광만을 부여안고 밤길을 향해간다.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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