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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시민 배반한 종교간의 분열

기자명 법보신문

전장 속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돌아보다

‘내부의 적으로부터 무너진다.’혁명사의 전통적인 이 화두는 버마 민족해방. 민주혁명전선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1994년 말을 돌이켜 보면, 버마 소수민족들의 해방투쟁을 주도해 왔던 카렌민족해방군(KNLA) 분열은 혁명사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며 버마군사독재정권 장기화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더구나 그 적전 분열이 정치적 신념이 아닌 ‘종교’를 내세웠던 탓에 혁명전선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흐른 뒤, 타이와 버마 국경을 가르는 모에이강 물도리동에 자리잡은 카렌민족해방군의 난공불락 요새로 또 버마군사정부에 맞선 50년 투쟁사의 상징이자 최대 격전이 벌어졌던 완카기지에는 이름만 바꿔 단 같은 얼굴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주민은 불교-해방군은 기독교

1994년 말 카렌민족해방군에서 떨어져 나온 뒤, 버마정부군과 손잡은 민주카렌불교도군(DKBA)의 특수대대가 장악한 완카를 10년만에 찾아든 기자에게 칫투사령관은 “그 때, 우린 지도부에게 민주주의와 종교자유를 요구했지만, 먹히지 않았다.”며 옛날을 회상했다.

“비록 우리가 버마정부군과 손잡고 있지만 카렌족 해방 목표는 변할 수 없는 대의다.”

칫투사령관은 민주카렌불교도군도 카렌민족해방군과 다를 바 없이 버마정부를 상대로 카렌족 해방을 위해 싸워왔다며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며 두 조직의 통일을 주장했다.

현재 카렌민족해방군 부사령관인 탐라보장군도 “둘로 나눠진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누구 잘못을 따질 것도 없이, 카렌해방을 위해선 무조건 통일해야 한다.”고 똑 같은 뜻을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치가 않다. 카렌민족해방군과 민주카렌불교도군 사이에는 이미 메우기 힘든 골이 파였다. 민주카렌불교도군이 버마정부군과 손잡고 거의 모든 카렌민족해방군 기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서로 ‘형제살해’라는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카렌민족해방군(KNLA) 분열은 혁명사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며 버마군사독재정권 장기화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통일은, 현실적으로 소수인 카렌민족해방군이 우리 쪽으로 흡수되는 길뿐이다.”

민주카렌불교도군 칫투대령은 “신세대들 사이에는 두 쪽 다 통합에 문제없다.”면서도 일방적인 흡수를 통합조건으로 내걸었다.

“천만에, 나라 안팎이 모두 인정하는 카렌민족해방투쟁 50년사의 정통성을 따라야 한다.”

카렌민족연합 의장 소바틴은 통일 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민주카렌불교도군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돌이켜 보면, 전통 불교사회였던 카렌족은 ‘민족분리정책’을 통해 버마를 지배해 온 영국식민정부에 협조하면서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 과정에서 버마족과 사이에 뿌리 깊은 불신감이 싹텄다. 그리고 카렌족은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버마연방에 흡수당하면서부터 지난한 민족해방투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6백만 주민 가운데 70~ 80%가 불교도인 카렌족 사회를 이끌고 해방투쟁을 벌여왔던 카렌민족연합(KNU)과 그 무장조직인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가 거의 모두 소수 기독교도였던 탓에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다수인 불교도들 불만이 쌓이면서 ‘불교도군 반란’ 소문은 이미 1988년 이전부터 줄기차게 나돌았다. 그러다가 1993년 말, 먀잉지우에서 이름난 우 투 짜나라는 승려가 카렌민족해방군 본부인 마너플라우 인근 산상에 사리탑을 세우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에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는 ‘산상 사리탑이 정부군에게 타격점을 제공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독교중심주의’에 젖어 있던 카렌 지휘관들이 불교도들에게 행패를 부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 민족해방-민주혁명단체들의 총본산이자 카렌민족해방군 본부였던 마너플라우는 버마정부군이 코앞까지 쳐들어와 함락 당하기 직전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판단에 실패한 카렌 지도부는 1994년 초, 6여단 지역에 있던 인쉬 사야도라는 승려를 마너플라우로 데려와 대형 수도원을 짓게 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람보 사야도’란 별명으로 불렸던 그이를 마너플라우 지역 불교도들은 아예 승려 취급도 하지 않았다.

“승복 속에 총 차고 다니고 계율도 지키지 않는 놈을 어떻게 승려라 불러.”

민주카렌불교도군의 탄생

불교도들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우 투 짜나는 현지 불교도들을 이끌고 살윈강과 모에이강 합류지점인 투므웨타에 독자적으로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1994년 말, 인쉬 사야도가 승려회의를 열어 ‘마너플라우 주변에서 기독교든 불교도든 일체 종교행위를 금지한다. 우투짜나도 떠나라.’고 선언하자, 불교도들은 그 결정이 자신들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믿고 마음을 정리했다. 전선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불교도전사들을 체포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며 불교도들을 더욱 자극했다. 12월3일, 국경 혁명전선이 뒤집혔다. 전략요충지이자 보급선이 걸린 트무웨타에서 카렌민족해방군 1여단, 6여단, 7여단 그리고 19대대, 21대대, 24대대 소속 불교도 전사 18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12월5일, 무려 1천여명으로 불어난 불교도 반란군과 200여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우 투 짜나를 지도자로 내세운 뒤, 기어이 민주카렌불교도군이라는 이름 아래 성명서를 날리고 말았다.

‘민주카렌불교도군은 모든 이권과 조직을 독점한 카렌민족연합 지도부의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정치를 거부하며 평화를 바라는 카렌 주민들 열망에 따라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

그리고 1995년 1월 26일, 민주카렌불교도군은 버마정부군으로부터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카렌민족해방군 본부이자, 자신들의 본부이기도 했던 마너플라우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렌족은 서로 다른 종교주의를 내걸고 출혈경쟁을 벌여왔다. 현재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민주혁명세력의 일원으로 투쟁해 온 카렌민족해방군이 나라 안팎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버마 정부군과 손잡은 민주카렌불교도군이 카렌민족해방군을 훨씬 웃도는 화력을 지녀 오히려 국경 주도권을 장악해버린 상태다.

국경 혁명전선은 이런 카렌해방투쟁사를 통해 민주적 사고와 절차를 무시한 종교중심주의 당파성이 어떤 결과로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결국, 카렌 해방도 또 버마 민주혁명도 모조리 뭉개버린 카렌의 분열은 시민을 배반한 종교행위였던 셈이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은 혁명전선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 채, 지금 모에이강에는 ‘종교가 누구를 위해 봉사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절절이 흐르고있다.

- 버마 완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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