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명살림 마음문화원 천 선 혜 원장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자리 찾으려 헤맸던 30년
이제야 적명스님과 약속 지켰죠


<사진설명>그녀의 나이 한살 때 갓난아이였던 자신을 꼭 안아주고 출가했다던 친오빠.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던 아련한 이미지의 그가 어느날 문득 나타났다. 짧게 깎은 머리에 잿빛 승복…. ‘오빠 스님’과의 불교성지순례는 그로하여금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살도록 했다.

오랜 세월 출가사문의 길을 걸어 왔고 지금은 참선수행자로 명상과 마음공부를 지도하고 있는 생명살림 마음문화원 천선혜(49·童眞) 원장. 그는 세사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휴&쉼’ 프로그램과 내가 곧 진흙탕 속의 연꽃임을 알도록 하는 ‘연꽃명상’, 여기에 요즘은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깨닫고 실천하도록 하는 ‘자연 공감’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 실시함으로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옛 것을 현대화하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러 현대 수행법들을 활용하되 예스러움이 묻어나도록 한다는 점에 그의 탁월함이 있다.

수행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직접 지도하고 있는 천 원장.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지금처럼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모두 미션스쿨에 다닌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것은 여성신학자였다. 어린 시절 떠나간 오빠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명상 프로그램 개발 지도

천 원장 나이 한살 때 갓난아이 동생을 꼭 안아주고 출가했다던 오빠.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던 아련한 이미지의 그가 천 원장의 곁에 나타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76년 봄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잿빛 승복…, 법명은 일장이라고 했다.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던 오빠가 나타나 뜬금없이 여행을 가자는 말에 선뜻 동의한 것도 한없고 맑고 따스한 눈빛 때문이었다.

‘오빠 스님’이 여동생을 데리고 여행을 다닌 곳은 봉정암, 도솔암, 봉은사, 통도사 등 오래된 사찰들이었다. 스님은 동생에게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수행자와 선지식들도 일일이 소개시켜주었다. 한번은 극락선원 경봉 스님이 ‘자연인이 되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너는 앞으로 극락엘 자주 오락가락 해야겠다’는 묘한 여운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여행일 뿐이라고 여겼던 천 원장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진부한 종교쯤으로 치부하던 불교를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구도의 종교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빠는 어쩌면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동생에게 평생을 가도 좋을 길을 일러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여행이 끝난 뒤 천 원장은 당시 일장 스님이 머물던 천성산 금강암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런 동생에게 오빠는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원각경』 등을 지도했고 좌선과 염불하는 방법도 자상히 가르쳐주었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나듯 오빠 스님과 생활을 하던 천 원장은 그해 겨울 금강암에서 공양주라는 명목으로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동안거 결제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끊임없이 외부로 치닫는 마음을 추슬러 내면을 비춰보면서 천 원장은 삭발염의(削髮染衣)한 출가자의 길을 가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안거가 끝나고 얼마 후 천 원장은 짧지만 평생 잊지 못할 만남을 갖는다. 적명 스님…, 기기암 선덕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납자들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는 스님이 당시 해제철을 맞아 금강암을 찾아 온 것이다. 한 순간도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잃지 않았던 수행자. 어느 날 적명 스님은 천 원장의 『원각경』 공부 노트를 바라보더니 “출가하면 훌륭한 강백이 되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적명 스님은 곧 출가할 거란 그의 말을 듣고는 “10년 뒤에 다시 만나 그 때 서로 공부한 견처(見處)를 내보이자”고 했다. 천 원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영향으로 오랜 출가생활

77년 5월 수덕사 견성암에서 묘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그는 운 좋게도 당대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응민 스님을 시봉하게 됐다. 한없이 자애롭지만 공부할 때는 호랑이처럼 엄격한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화두에 온몸을 내던졌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에게서 나기 전에는 무엇이 본래 면목인고…. 의심은 하루하루 깊어져 갔다. 그러나 허약했던 그의 몸은 혹독한 그의 정진을 좇아가지 못했다. 이가 우수수 빠지고 종양까지 생겼다. 큰 수술과 몇 달 간의 치료 후 그는 어른 스님들의 뜻대로 운문사로 향했고 그 곳 강원생활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 속에는 ‘10년 뒤 다시 만나자’는 적명 스님의 말이 늘 맴돌고 있었다.

강원을 졸업한 그는 이후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석남사, 미타사, 양진암, 흥륜사 등 선방을 다니며 정진했다. 또 해제가 끝난 후의 가행정진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잡힐 듯 잡힐 듯 그 무엇은 잡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번민과 절망감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한동안 좋아지는 듯싶던 몸도 다시 병들어 갔다.

미국서 불교-환경 접목해 가르치기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던 89년 8월 한 지인의 권유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영성공동체모임(Emissaries of Divine Light)에 참여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자연의 벗이자 자연의 제자였다. 천 원장은 그곳에서 생활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도하는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배워나갔다. 이런 가운데 승려로서 삭발을 하기 위해 LA관음사를 가기도 했지만 혼자 머리를 깎고 회색옷 만을 찾아 입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권에 섞여 살며 삭발염의만을 고집하는 게 정말 의미있는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당분간 머리를 깎지 않기로 마음먹게 되고, 이것이 결국 천 원장의 환속 아닌 환속으로 이어지게 됐다.

미국에서 불교와 자연주의 생명관을 결합한 수행프로그램을 10여 년간 지도하던 천 원장은 90년대 말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귀국했다. 주변의 권유로 한국에 상주하게 된 그는 전주 모악산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하다 최근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에 정착했다. 그리고는 환경단체 임원들을 중심으로 참선이나 요가 등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줄곧 지도해 오고 있다.

“머리를 기르다보니 사찰 관람료를 내야 할 때가 많더군요. 그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라면 차이지요. 하지만 지난 30년간 줄곧 ‘마음자리’ 하나 찾으려고 살아왔습니다. 그 마음이야 어찌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적명 스님을 만나도 마음 편안하고 당당할 것 같아요.”

매일 새벽 화두참구로 하루를 시작해 농사와 명상으로 산다는 천 원장.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줄 알게 됐다”는 그는 어쩌면 어린 시절 ‘자연인으로 살며 남을 돕겠다’는 그의 어릴 적 꿈을 실현한 듯 싶었다.

남양주=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