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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 [중]

기자명 법보신문

틈만 나면 역경…돈만 보면 출판

운허 스님이 통도사에 머물며 후학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이 나라 불교계에서는 ‘왜색불교를 몰아내자’는 ‘불교정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교정화운동은 청담, 효봉, 동산, 금오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청정비구가 이끄는 불교’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때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부터 운허 스님에게 연락이 빗발쳤다. 하루 속히 서울로 올라와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하라는 독촉이었다. 그러나 운허 스님은 초연한 자세로 오직 불교사전 편찬을 위한 원고작성과 후학양성을 위한 강의에만 전심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자 선학원 측의 대의 스님이 운허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통도사까지 내려왔다.

“나는 이쪽저쪽 다 자격이 없네”

“이것 보시오, 운허 스님. 스님께서는 불교 정화운도에 반대하십니까?”
대의 스님은 운허 스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운허 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화운동에 나도 대찬성이오.”
“아 그러면 기꺼이 동참을 하셔야지. 무슨 까닭으로 동참을 하지 않고 있는 겁니까?”

운허 스님은 한동안 대답이 없으셨다. 정화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의 스님이 계속 물고 늘어졌다. 운허 스님이 한참만에야 그 이유를 밝히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출가하기 훨씬 이전에 장가를 들어서 처와 자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 그거야 출가하기 전에 있었던 일. 지금에야 당당한 청정비구가 아니십니까?”
“물론 지금은 비구승이라 하겠소이다만, 나는 엄연히 처와 자식을 두었던 사람인데, 그런 내가 감히 어찌 남의 허물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불교정화운동에는 양심상 동참할 자격이 없소이다.”
“에이 그러시지 말고, 여, 여기에 도장만이라도 찍어주십시오. 동참한다는 이 명단에 도장만 찍어주면 됩니다.”

대의 스님이 서명날인만이라도 해달라고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나 운허 스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이 서류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일 이 운동에 동참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불교정화운동이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동참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서울에서 내려온 대의 스님은 운허 스님의 서명날인을 받지 못한 채 상경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에는 또 불교정화운동에 반대하는 대처승 측에서 운허 스님을 찾아와 자기네 측에 가담해달라고 서류를 내밀며 서명날인을 부탁했다.

“운허 스님은 분명 부인과 자녀들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만… 그래서 말씀인데…아 지금에 와서 처자식 있는 중은 절에서 나가라고 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운허 스님은 물론 우리 편이시겠지요?”
“미안한 말씀이지만, 나는 어느 편에도 가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그리 아십시오.”
“예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출가 전에는 처자식이 분명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니, 청정비구에도 가담할 자격이 없고, 처자식 있는 대처 측에도 가담할 자격이 없으니, 이쪽저쪽 어느 쪽에도 자격이 없단 말입니다.”

결국 운허 스님은 ‘양심상’ 비구 측에도, 대처 측에도 설수가 없었다. 스님은 정화파도 아니었고, 정화 반대파도 아닌 경학파(經學派)였던 셈이요, 운허 스님의 화두는 오직 경전의 한글화였다.

운허 스님은 길을 걸어가실 때를 제외하고는 늘 손에서 부처님 경전을 내려놓는 일이 없었다.

“보약 살돈으로 한글경전 펴내자”

후학들에게 강(講)을 하던가, 아니면 어려운 한문경전을 우리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계셨으니 잠시도 불경을 놓는 일이 별로 없으셨다.

이 무렵 운허 스님의 세속 나이 68세나 되었으니 밤새워 역경작업에 매달리는 것은 건강상에도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 월운이 제발 쉬엄쉬엄 하셔야 한다고 애원했다.

“쉬엄쉬엄 하면 좋겠다마는 내 나이 어느새 예순일곱, 앞으로 꼬박 밤을 새워 역경을 한다고 해도 과연 몇 권이나 작업을 마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니 어찌 쉬엄쉬엄 할 수 있겠느냐? 시간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이때 운허 스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제자 월운이 그동안 한푼한푼 모아 둔 돈으로 스승의 보약을 사오려고 했다. 스승의 건강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운허 스님이 펄쩍 뛰며 반가워했다.

“무엇이라? 내 보약을 지어올 돈이 있다는 말이더냐?”
“예, 용돈 쓰라고 신도들이 가끔씩 주고 간 돈이 조금 있사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스님 보약을 지어올까 합니다.”
“잘 되었다. 그 돈으로 『한글 금강경』책부터 펴냈으면 좋겠구나.”
“예에? 그 돈으로 한글 책을 내자구요?”
“그래. 그 돈으로 약을 지어다 먹으면 나 혼자만 약을 먹게 되지만, 그 돈으로 한글 금강경 책을 펴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건 부처님 보약을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이는 일이니, 그렇게 하자꾸나.”

앉으나 서나 한글대장경

운허 스님은 정말 ‘부처님 경전의 한글화’에 ‘미쳐있는’지경이었다.
틈만 나면 역경작업이었고, 돈만 보면 한글경전 출판이었다.

이렇게 해서 운허 스님은 그토록 가난했던 시절에도 우리나라 불교역사상 처음으로 『사미니 율의』한글본을 책으로 펴내시었고, 『한글 금강경』. 『비구니계본』, 『불교사전』, 『정토삼부경』, 『수능엄경』등 한글판 불교경전을 속속 번역 출판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고 계셨다.

운허 스님에게 역경사업은 화두의 경지를 뛰어넘어 ‘목숨’바로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운허 스님에게는 오직 ‘한글로 된 팔만대장경’이 있을 뿐이었다.

윤청광(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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