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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 밝히니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금강경 간병인’ 박행자 씨

“할매요, 날씨도 엄청 좋은데 우리 산보나 하까예?”
“또 물리치료실 가잔 거 아이제?”
“치료 열심히 받으야 할배랑 다시 속닥이며 살지예. 그라고 시방 치료실 가는 건 진짜 아입니더.”
“그라믄야 뭐 괘안치만….”

부산 동아대병원 10층 입원실. 침상 옆에서 할머니에게 나지막이 금강경을 들려주던 간병인 박행자(원행심·63) 씨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꼭 쥐었다. 처음 할머니는 오른 팔과 다리를 쓸 수 없었고 말도 전혀 못했다. 박 씨는 한달새 할머니가 그나마 거동이 가능하고 말도 조금씩 하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분 소원대로 병이 나아 논에도 들에도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10년째 간병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 씨는 이 계통에서는 꽤 유명하다. 의료진이 직접 환자를 소개해 줄 정도로 돈독한 신뢰를 얻고 있으며, 그에게 환자를 맡기기 위해 때로는 보호자들 간에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 비결은 환자를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의 지극한 정성과 밝은 표정에서 비롯된다.

간병인은 말 그대로 환자를 24시간 내내 돌보는 사람. 먹이고 씻기는 것부터 시작해 대소변을 치워야 하는 것은 물론 밤새 환자를 주물러야 할 적도 많고, 때때로 환자의 짜증과 보호자들의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아야 할 때도 잦다. 철저히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야 하는 고된 일상, 많은 이들이 간병인을 자청했다가도 쉽게 포기하는 이유도 이런 어려움 때문이다.

간병하며 금강경 수만 번 독송

이제는 간병인을 천직이라 여기는 박 씨도 처음 오십 줄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미용실에 커피숍 운영까지 한 동안 잘 나가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갑자기 경기가 나빠지고 손님이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결국 큰 빚만 떠안고 물러나야 했다. 거기에 남편까지 실직하게 됨에 따라 박 씨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생활정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간병인 모집 광고, 그는 앞뒤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일을 시작했다. 막연히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육체적인 힘겨움이야 둘째 치더라도 이래저래 받는 스트레스는 더욱 그를 지치게 했다. 여기에 퇴직자 남편과 늘 술에 절어 살며 사고를 달고 사는 자식까지…. 이런 탓에 간혹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더라도 격렬한 말다툼으로 번져가기 일쑤였다. 박 씨의 절망과 분노는 하루하루 깊어갔다. 한 동안 잠잠하던 위장병과 피부질환도 재발해 그를 괴롭혔다. 박 씨에게 삶은 임종을 앞둔 환자마냥 그저 고통의 반복으로 와 닿을 뿐이었다.

임종직전 환자 “고맙다”며 숨 거둬

박 씨가 금강경 독송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불교공부를 권유받은 그는 금강경에 나머지 인생을 걸기로 했다. 박 씨에게 그 여동생은 나이야 비록 자신보다 훨씬 젊지만 온갖 절망 속에서 금강경 하나로 고난을 극복해 온 그야말로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2000년 10월 24일, 박 씨는 금강경 1만 번을 독송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경전을 꺼내 읽는 게 부끄러워 병원 복도나 화장실 혹은 남들 모두 잠든 시간을 이용했다. 하지만 횟수를 더할수록 자신감이 새록새록 솟아났고 지금 하는 이 공부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일임이 온몸으로 느껴져 왔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진실)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처음 무작정 읽었던 구절들이 반복해 독송할수록 가슴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소용돌이치며 울려 퍼졌다.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은 세상사. 헛되고 헛된 욕망에 이끌려 얼마나 나와 남을 괴롭혀 왔던가. 경전을 독송하다보면 울컥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 삶에 미안해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삼라만상에 미안해서 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처음 1만 독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잠도 서너 시간으로 줄여가며 정진했지만 나중에는 금강경이 그를 이끌어 갔다. 환자를 돌볼 때건, 휠체어를 밀 때건, 복도건 화장실이건 문득문득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 또 환자에게 금강경을 들려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렇게 14개월 만에 금강경 일만 독을 끝낼 수 있었다.

금강경이 박 씨를 편안케 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점 중 하나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다. 돌봐야 될 대상으로 보이던 환자들이 어느새 가족으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 와 닿기 시작한 것이다.

간병해야 할 환자들이 그렇듯 박 씨의 환자들 또한 암이나 심한 화상 등으로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중증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늘 엄청난 고통과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 박 씨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경전을 독송했다. 그 때문인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과 손길에도 온화함이 배어났다.

“식물인간이 된 할배를 모신 적이 있심니더. 하루도 안 빼고 맨날 금강경을 들려드렸지예. 두해 지나고 참말 편하게 가시는 할배를 지켜봄서 내사 눈물도 마이 흘렸지만 이 일이 참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심더.”

한 번은 숨이 끊이기 직전의 환자가 들어와 그을 위해 5시간 내내 금강경을 독송했는데, 갑자기 그 환자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고마워요, 당신이 나를 살렸어요”란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박 씨는 경전의 힘으로 그가 다음 세상에는 좀 더 좋은 인연을 맺을 거라 확신했다.

금강경은 박 씨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몸의 병이 나은 것은 물론 가족 간의 불화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 도울 수 있어 ‘행복’

“대부분 억수로 고통을 겪으며 죽는기라요. 돈 많은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많이 배웠건 그렇지 않건, 나이가 많건 적건 죽음은 차별이 없지예. 지가 쌓은 업의 무게에 따라 고통 받다가 다시 태어나는 거라예. 죽음을 알라고 해야 사는기 아름답고, 사는기 아름다와야 죽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 아입니꺼.”

박 씨는 자신이 간병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이 일로 인해 불연(佛緣)을 맺어 지혜를 밝히게 됐을 뿐 아니라 고통 받는 이들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문득 그의 맑은 얼굴과 경상도 사투리가 짙은 먹구름을 헤집고 나온 초여름의 햇살만큼이나 정겹고 따사롭다.

부산=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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