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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수행 겸비한 스리랑카의 자존심

기자명 법보신문

반테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상〉

세계의 수행자를 소개하는 본 코너를 통해서 처음으로 스리랑카 출신의 스님을 소개하게 되었다. 바로 헤네폴라 구나라타나(Henepola Gunaratana 1927∼)스님이다. 스님은 작년에 서울 보리수선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셔서 약 한 달 정도 집중수행지도를 하셨고, 가양동 홍원사의 초청으로 10월 하순 다시 한국에 오셔서 7일간의 집중수행지도와 학술대회의 기조 법문을 해주실 예정이다. 미국에서 10만부 이상 보급된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손혜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1)이라는 책으로 한국의 수행자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는 스님이다. 반테 지(Bhante G)라는 애칭으로 서양인들은 부르고 있는 이 스님은 1968년 이후 미국에서 머무시면서 전 세계에서 수행을 지도해 오고 있는 분이다. 1977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지만, 반테 지는 여전히 스리랑카 스님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무대로 불교수행을 전하고 있는 학승이자 수행지도자이다.

필자는 작년에 홍원사 학술대회 일로 스님을 잠시 뵙고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소박하신 시골 노스님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2003년에 출판된 스님의 자서전 『Journey to Mindfulness - The Autobiography of Bhante G.(마음챙김으로의 여행 - 반테 지의 자서전)』를 구해 보면서 스님의 75년간의 삶의 역정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엿볼 수가 있었다. 스님의 전기를 소개하기 전에 스리랑카 불교의 특색을 조금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스리랑카에는 미얀마나 태국과 같은 훌륭한 수행지도자가 없는가에 대한 이유가 스리랑카 불교사를 조금 들여다보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경전공부 부작용이 수행인연

2300년 전에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래된 이후 300년이 지난 후, 지금부터 약 2000년 전부터 교학을 중시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 전후의 스리랑카 역사와 불교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 넘어온 타밀족과의 전쟁 와중에서 스리랑카 왕실과 불교 교단은 여러 면에서 위기에 처하였다. 그 위기 아래에서 불법이 전해지기 위해서 교리와 수행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결정짓는 승단의 회합이 있었다. 당시까지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승들도 많이 있었지만,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행보다는 교리가 더 근본이 된다는 쪽으로 승단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즉 “만약 무엇을 실천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이 없다면, 어떤 수행이 실천되어질 수 있는가?”라는 교학을 중시하는 승려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경율론 삼장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불법(佛法)의 존속을 위해 더 근본이 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수행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승려들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스리랑카 승가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조사 연구」 일중스님, (『세계 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가산불교문화원 1997, 18쪽)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아래 스리랑카불교계는 수행보다는 교학의 전승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학 중시 스리랑카에선 ‘별종’

필자가 1990년대 중반에 스리랑카를 2차례 방문하여 직접 수행처를 방문하고 조사하면서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10대 초반에 어려서 출가한 승려들은 대부분 교학을 익힐 수 있는 강원이나 승가 대학에서 교학을 공부하지만, 20대가 지나서 출가한 승려들은 이러한 강원 교육이나 전문적인 교학공부를 하지 못해서 숲 속의 수행처에서 수행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미얀마와 태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얀마의 경우는 교학을 충분히 익힌 후에 약 10%의 승려들은 위파사나 수행을 경험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위파사나 수행지도의 길을 가고 있었으며, 태국도 교학을 한다고 해서 수행승을 폄하하는 전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수행을 하는 승려들은 나이 먹어 출가한 늦깎이가 대부분으로 교학에는 어둡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직접 만나본 수행승 가운데에는 교학적인 이해도 깊고 수행력도 뛰어난 분들도 있었다.

구나라타나 스님도 12살에 출가하여 전통적인 승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경전을 배워야 쉽게 그 내용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이 남방상좌불교의 사회적인 통념이다. 하지만 절에 들어가 탁발이나 스승의 학대에 고생을 하기도 하였고, 15세에 만난 마을 소녀와 우물가에서 만나 나누던 로맨스를 회상하면서 구나라타나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출가는 성숙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길을 결정하는 진지한 선택이므로 단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어려서 출가하는 것보다, 어린 시절을 세속적인 교육을 받으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보낸 후에 성인이 되어서 결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말을 남겼다.(자서전 63쪽) 솔직하면서도 생생한 스님의 어린 사미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리랑카 승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0년간 미국서 지도

비구가 되기 전에 전통교육 기관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구나라타나 스님은 좋은 전생의 업에 의해 읽은 경전의 내용은 바로 이해하고 외우는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한 번 본 것은 사진을 찍은 듯이 기억하는 기억력 때문에 공부는 빠른 진전을 보였다. 경전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등의 어학을 빠르게 습득하게 되었다.

구나라타나 스님이 만 20세가 되던 1947년에 비구계를 받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7일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신참 비구들이 교대로 호경(護經, Paritta)을 외우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 기간 동안에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 1주일동안 밤낮으로 경전을 외웠다. 구나라타나 스님은 7일 동안 잠자지 않고 호경을 외웠고, 그 부작용으로 사진을 찍는 듯한 기억력뿐만 아니라 모든 기억력을 잃게 된다. 뇌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강원으로 돌아갔지만, 기억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5분전에 만난 사람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온갖 방법을 써보았지만, 기억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 때 구나라타나 스님은 『대념처경』에 제시된 수행을 비밀리에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동료 비구들은 수행은 나이 먹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젊은 나이에 수행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호흡, 몸의 감각과 느낌, 흘러가는 생각들을 관찰하는 4념처 수행을 통해서 스님은 점차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고, 몇 달 만에 드디어 기억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학 강사
metta4u@emap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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