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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역경사업 해야지”[br] - 운허 〈하〉

기자명 법보신문
6.25한국전쟁 후 운허 스님은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 주지 발령을 받아 봉선사로 돌아왔다. 봉선사를 떠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봉선사는 옛날의 그 봉선사가 아니었다. 6.25한국전쟁 통에 대웅전은 불타버렸고 절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들 먹이려고 양식 탁발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운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했던 광동중학교 역시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학교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임시 가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살림이 어려워 교사들 월급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 교사들이 끼니를 굶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봉선사의 살림형편도 말씀이 아니었으니 절에서 도와 줄 수도 없었다.

운허 스님은 드디어 비장한 각오로 양식 탁발에 나섰다. 젊은 스님들이 만류했다.
“스님, 탁발은 저희들이 나가겠습니다. 절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노 스님이 탁발을 나가시다니요?”

“아니다. 나는 지금 절 양식을 탁발하러 나가는 게 아니야. 광동중학교 선생님들이 굶고 있어, 선생님들이 굶고 있는데 명색이 학교 이사장이라는 내가 절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그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운허 스님은 기어이 70노구를 이끌고 교사들을 먹이기 위해 양식 탁발에 나섰다.
“봉선사 노 스님이 광동중학교 선생들 먹여 살리려고 탁발에 나섰다더라.”

이 소문은 삽시간에 인근 마을에 번졌고, 마음씨 고운 우리의 보살님들이 너도나도 양식을 보태주어 굶고 있던 광동중학 선생님들의 끼니를 이어주었다. 이에 떠나려던 교사들도 노 스님과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정에 감동, 다시 주저앉아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게 되었다.

이 광동중학은 6.25이전에만 해도 운허 스님의 간청으로 춘원 이광수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고 춘원이 직접 교가를 지어주기도 했던 유서 깊은 학교였다.

당시 춘원 이광수 선생이 지어준 광동중학 교가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운학산 구름속이 우리들 배우는 집. 동백숲 푸른 그늘 맑은 물 흐르는데 광동, 광동, 우리 모교. 구름이 간들 산이야 움직이랴. 눈서리 되게 쳐도 송백은 한빛일세 광동, 광동 , 우리 모교. 바다로 흘러흘러 쉬임 없는 내와 같이 광동의 밝은 빛이 이 나라 빛내로세. 광동, 광동, 우리 모교.”

“책은 절대로 거저 보면 안되네”

혈기왕성 했던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운허 스님이었지만, 스님은 타고난 교육자요 선비기질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운허 스님은 늘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교경책들을 운허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보물’로 여기시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한글로 옮겨 책을 펴내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친 분이었다.

아마도 운허 스님처럼 책을 소중히 여기고, 책을 사랑하고, 책을 아끼고, 책 펴내는 일에 일생을 송두리째 바친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것 보시게 월운이, 춘원이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쓴 덕분에 불교 포교가 많이 되었네. 앞으로 팔만대장경이 모두 한글대장경으로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면 누구나 쉽게 읽고 배워서 나중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아 멋진 시와 소설, 연극은 물론이요 활동사진까지 만들게 될 것이야.”

운허 스님은 그렇게 먼 훗날까지 내다 보시며 경전의 한글화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뿐만 아니라 운허 스님은 가난한 문인이나 교수나 학자가 책을 펴내 스님께 증정본을 보내오면 제자 월운에게 반드시 책값과 소포비용을 보내게 했다.

“책은 절대로 그냥 얻어 보면 안되는 게야. 자고로 선비는 가난하니, 공부하고 연구하기도 힘든 터에 이 귀한 책까지 펴냈으니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했는가?” 어려운 살림에 연구하고 글 쓰고 책까지 내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거늘 이 귀한 책을 어찌 거저 본단 말인가? 책은 절대로 거저 얻어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니 어서 가서 송금을 해드리고 오게.”

운허 스님은 책값에 소포 비용까지 넉넉히 얹어서 반드시 송금토록 했다. 그리고 친히 “귀한 책, 감사히 잘 받았노라”는 정중한 편지까지 꼭꼭 써 보내셨다.

살아서 미리 밝힌 유서

선비를 아끼고, 학자를 존경하며 그 분들이 봉선사로 스님을 찾아오기라도 하면 반드시 봉투에 여비를 담아 예의를 갖추던 분이 바로 운허 스님이셨다. 그러나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돈 한 푼 쓰시기를 벌벌 떠신 분이었다.

몇 십 년을 쓰신 손거울은 손수 창호지로 만든 거울집에 들어있었고, 하두 오래 써서 색깔도 구별되지 않는 낡은 비누곽, 군데군데 구멍이 난 털 목도리, 50년 넘게 애지중지 쓰시던 가죽 손가방은 너무 닳고 달아서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웃곤 하면서 제발 그만 버리시라고 하였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인석아, 그런 소리 말어! 이래뵈도 이 손가방 나이가 네 나이 두 배도 더 넘어!”하시며 손떼 묻은 그 가죽 손가방을 어루만지곤 하셨다.

그런 스님께서 1972년 음력 동짓달 스무사흘날 경송 노 화상의 제사날 모인 제자들에게 당신의 유언장을 미리 공개 하고 신신 당부했다.

“나 죽은 뒤의 일을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문도장으로 봉선사 화장장에서 다비하라. △장례는 3일장으로 극히 검약하게 하라. △화환과 비단 만장은 사절하라. △사리를 수습하려 말라. △대종사라 칭하지 말고 ‘법사’라고 쓰라. △마음 속이는 중노릇 하지 말라.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10여 항목에 이르는 유언은 모두다 청빈한 스님의 뒷일을 청빈하게 마무리 해달라는 당부였다.

운허 스님은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이 있노라고 늘 말씀하셨다.

“다음 생에 반드시 대한민국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그것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20살까지는 공부를 한 뒤에 삭발출가 해서 불경을 우리말 우리글로 옮기는 역경사업을 다시 하려고 해. 내생에도 나는 꼭 역경사업을 할 것이야.”

‘돈 없는 역경사업’에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그 돈으로 역경사업을 하고 싶다’고 소원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운허 스님은 이미 우리나라 어느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쯤 25세 전후의 당당한 대장부로 출가의 날을 저울질하고 계실것만 같다.

윤청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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