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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성우

기자명 법보신문
만다라는
내 마음의 고향
빈 캔버스 내놓을 때
나의 그림은 완성


전성우(71세) 화백은 “붓질 할 때마다 나의 번뇌도 털어지길 기대한다”며 “빈 캔버스를 당당하게 내 보일수 있을때 나의 그림도 완성된 것”아라고 말했다. 현재 가나아트센턴에서 ‘전성우 50년의 발자취’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회는 6월 19일까지. 02)720-1020

만다라는 수행을 통한 성불의 의지를 가시화 한 도상이자 질서를 말한다. 색채와 형태의 기본적인 결합체로서의 이 도상은 치밀한 작도와 꼼꼼함 마무리 속에서도 놀라운 회화성,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다. 만다라는 보는 이의 시각적 사실로는 결코 가늠하기 어려운 심오한 상징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다라는 종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만다라 그리기 40여년

전성우는 오랜 시간 일관되게 이 ‘만다라’를 추상미술과 접목시킨 그림을 선보인 작가다. 그는 1950년대에 미국에 유학해 추상표현주의를 공부하고 활동한 후 귀국해 동양사상과 현대미술(추상)을 접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을 한 단계 끌어올린 족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작가보다도 간송미술관 관장, 보성학원이사장으로서 더욱 명망있는 존재다. 그의 선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한국미술의 국보급문화유물을 지키고 보존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는 서울대하교 미술대학에 다니다가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그림공부를 하고 와서 서양 미술에 정통했으며 또한 간송의 자제로, 우두 김광균의 사위로, 혜곡 최순우 선생과 오랜 교류로 인해 한국미술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작가다.

전성우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1950년대에 미국에서 그림 수업을 하고, 당시 미국의 새로운 미국적 미술사조의 다양한 추상표현주의에 자극과 영향을 깊게 받았다. 1960년대는 미국화단에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와중에 돌연 귀국을 했다. 서울의 부친이 1962년 1월에 작고함에 따라 장남으로서(형이 있었으나 일찍이 병사) 집안의 중심을 맡아야 했던 사정에 따른 것이었다. 작가로서의 작업활동과 함께 한편으로는 선친이 물려준 방대한 전통미술의 유물을 정리하고 이를 소장, 연구할 간송(澗松)미술관의 설립 운영및 집안의 사학(私學)재단인 보성고등학교의 일을 병행했어야 했다. 따라서 작업에 전적으로 전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60년대 중반 당시 한국에 서구 첨단의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소개한 화가이며 고도의 동양적 세계관을 서구 조형에 융합시키고자 애쓴 작가로 여전히 기억된다. 그러니까 전성우는 풍문으로만, 책 속의 공허한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구미의 추상미술을 직접적으로 체득하고 온 이며 동시에 서구에서 나온 추상을 민족적 전통과 문화적 맥락에서 수용하고 해석하는 작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작가다. 한국의 전통미술이란 결국 불교미술이며 그 불교적 세계관, 사상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도상의 하나가 만다라라고 생각한 그는 그 만다라를 통해 동양적 추상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불교미술의 현대적인 작업으로 가시화되었다.

東회화 西추상 조화

그는 회화작업의 모티브로 불교적 세계관을 설정하였고 그 대표적인 상징으로 만다라를 선택, 이를 응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적, 동양적 추상회화의 세계를 만들어나간 선구자다. 자신의 창의적인 방법과 지향을 모색하고 시도하던 과정에서 깊은 사고 끝에 한국인 화가로서의 동양적 모티브로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만다라였던 것이다. 동시에 그 만다라는 단순한 종교적 도상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동양의 밀교 미술의 오묘한 상상력과 경이로운 표현 형식, 그리고 세밀하고 찬란한 채색묘사로서의 밀교 제존상(諸尊像)과 만다라 도상(圖像)의 역사적 전통 파악 및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그 위에 얹혀놓고 있다. 사실 전성우가 만다라를 만난 것은 그가 유학했던 밀즈 대학의 만다라 컬렉션으로 인해서다. 스승의 지도로 그 만다라를 정리하다가 만다라의 수많은 형상들이 펼쳐놓은 초월적 경지에 심취,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40여년 동안 만다라라는 하나의 주제에 몰두하고 변주하며 자신만의 만다라의 길을 캔버스 위에 구현하고 있다.

매혹적 색상표출 ‘환상적’

“나에게 만다라는 가장 순도 높은 예술적 충동이며, 미의 구경일 뿐만 아니라 정화의 이상에 도전하는 다할 줄 모르는 노력인 것입니다. 화가이 만다라는 창작이라는 신비로운 비밀의 대답인 것입니다. 나의 욕망은 절대순수 평화를 찾는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하루를 찾고자 합니다. 만다라의 세계는 밝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힘찬 것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의 개인전에 출품된 만다라 연작에 대해 미술평론가 알프레드 프란켄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

“약 10년 동안 이곳(미국)에 와 있는 한국인 화가 전성우는 동양의 회화전통과 서양의 추상표현의 전통을 아주 성공적으로 융합시키고 있다. 은근한 광택과 시적(詩的)이며 서정적인 그의 예술적 특질은 여지없이 동양적이다. ‘만다라’ 사상의 강조, 곧 원형과 둥글넓적한 형태의 불교적인 ‘무상원만(無上圓滿)’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그 주제가 여러 가지를 암시해 준다. ‘온고(溫故)의 정(情)’이다.”

그는 또 “앞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심장의 고동을 그리고 싶다. 밖으로 나타나지 않고 의식되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한 생명체, 그것을 그리고 싶다. 나의 회화는 모두 자연의 법칙에 그 근원을 둔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작업의 뿌리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밝혔다. 그러니까 전성우의 ‘만다라’는 불교적 해석만이 아니라 자연만상과 우주생성, 그 순환 및 유전의 근원적 표상으로 귀착시켜 표현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만다라가 그의 가슴에서 걸러 나왔지만 그것은 불교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순환하고 유전하는 자연만상과 우주생성의 근원적 표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만다라도 다채로운 변화를 거듭했다. ‘향토만다라’,‘시의 만다라’, ‘색동만다라’,‘회전만다라’,‘지신. 설경만다라’, ‘광배만다라’를 거쳐 최근에는 ‘청화만다라’를 그리고 있다. 대부분 대작인 이 ‘만다라’ 화면들은 생동적인 색상, 순수한 농도의 환상적 발산, 밝고 투명하며 매혹적인 발색(發色)효과와 선명한 광도(光度)의 색상 조화를 통해 형상 되었다. 자연스런 느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작가는 캔버스를 지면에 평면으로 펴놓고 유채물감을 흘리듯이 엷게 구사하거나 뿌리고 혹은 번지게 하여 자율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그 색상은 캔버스에 칠해지기보다는 스며들고 물들여지게 한 효과로 투명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의 표현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우주는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심장이 잠시라도 멈추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뛰는 심장을 의식하지 않으면 회전하는 우주를 느끼지 못합니다. 밖으로 나타나지 않고 의식되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한 생명체, 나는 우주와 같은, 심장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미술평론가,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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