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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상〉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이 굶는데 밥이 어찌 넘어가리

한영스님 문하에서 정진
종정 내던지고 도제양성
날짐승 겨우살이도 걱정

11세 고아돼 동진출가


만암 스님은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백양사 중흥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스님은 1876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고, 열한 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곧바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백양사로 들어가 취운 도진 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삭발 출가하셨다.

최근 필자가 확인한 문헌에 의하면 만암 스님 보다 네 살 위인 형이 있었는데 속명은 진섭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진섭이 훗날 전남 영광군에 있는 불갑사 주지로 재임 중에 열반에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셋째 아들 진섭과 넷째 아들이었던 만암 스님(속명은 宗憲)을 한꺼번에 사찰에 맡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부모 없는 고아가 된 만암 스님은 4,5년 동안 백양사에서 행자시절을 보내고 16세 되던 해 구암사로 옮겨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경문을 배워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훗날 백양사로 돌아 온 만암 스님은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세우고, 광산에 정광고등학교를 세우고, 오늘날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 교육을 통한 도제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사영정 모시려 눈속서 알몸대결

1954년 만암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 때 정화파 강경세력이 종조를 태고보우 스님에서 지눌 보조 스님으로 바꾸자 “환부역조’(환부역조)한 무리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언, 종정 자리를 내던지고 백양사로 내려가 오직 반선반농(半禪半農)으로 후학들을 키우며 두문불출, 1956년 12월16일 세수 81세, 법랍 71세로 열반에 들었다.

만암 스님이 젊었을 때, 백양사 문중의 조사이신 연담선사(蓮潭禪師)의 영정을 구암사에서 백양사로 옮겨 모셔온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조의 연담선사(1720-1799)와 백파선사(1767-1852)는 백양사 문중의 법령제도서 연담문인, 백파문인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연담선사의 진영이 백양사에 모셔져 있지 않고 구암사에 모셔져 있었다.

이를 늘 섭섭하게 생각했던 만암 스님은 언젠가는 반드시 연담선사의 진영을 반드시 백양사로 모셔 와야 한다고 다짐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겨울, 만암 스님이 구암사에 가니 마침 연담선사의 진영에 별로 관심들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만암 스님은 무작정 연담선사의 진영을 조심스레 떼어 걸망 속에 넣고 구암사를 빠져나와 백양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연담선사의 진영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구암사의 한 스님이 쏜살같이 만암 스님의 뒤를 쫓아왔다.

결국 두 스님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산속에서 연담선사의 진영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맞서게 되었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으나 얼른 결판이 나지 않았다. 만암 스님이 구암사 스님에게 한 가지 내기를 걸었다.

“이 눈밭 속에서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해서, 이기는 쪽이 연담 선사의 진영을 가져가기로 합시다. 어떻소?”
“좋소! 그렇게 합시다.”

건장한 체격의 구암사 스님은 가녀린 체격의 만암 스님을 얕잡아 보고 단번에 승낙했다.
한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 북동한설 속에 두 스님은 아랫도리를 훌렁 벗어젖힌 채 눈밭에 정좌를 하고 앉아 오래 버티기 시합을 벌였다.

“아이구...사람 죽겠다.”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던 구암사 스님이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죽을 각오로 이를 악다물고 앉은 만암 스님의 무서운 인욕심 앞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담 스님의 진영은 구암사에서 백양사로 옮겨 모셔지게 되었으니 만암 스님은 이 진영을 모셔온 후 백양사에 조사전을 짓고 도의국사를 비롯한 선사들의 위(位)를 모셔 선조 스님들에 대한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자나깨나 중생들의 굶주림 걱정

만암 스님은 말 그대로 자비보살의 화현이었다고 후학들은 전한다.

겨울이 되어 온 산에 눈이 쌓이고 북풍이 몰아쳐 산하대지가 꽁꽁 얼어붙으면 만암 스님은 맨 먼저 들짐승 날짐승들의 겨우살이부터 걱정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손수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어 산짐승 날짐승들이 마음 놓고 백양사 마당으로 내려와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만암 스님이 절 마당에 나타나시면 산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노루, 고라니가 마음 놓고 백양사 마당으로 내려와 스님이 주시는 먹이를 마음껏 먹고 갔고, 스님이 발우에 모이를 담아들고 절 마당에 나서시면 까막까치가 마음 놓고 날아와 모이를 실컷 먹고 날아갔다. 법당 뒤 헌식대 위에 먹을 것을 늘 놓아두었기 때문에 다람쥐, 산토끼까지 즐겨 찾곤 했다.
뿐만 아니라 백양사에는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터줏대감으로 눌러 살고 있었는데 만암 스님은 이 도둑고양이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시며 “살생하지 말아라. 더 이상 살생하지 아니하고 선업을 쌓으면 후생에는 반드시 사람 몸을 받을 것이니라”하시며 따뜻한 목소리로 타이르셨다.

그 도둑고양이도 스님의 설법을 알아듣기라도 했던 것일까? 백양사에 머물면서는 쥐 한 마리도 잡아먹는 일이 없었는데 이토록 들짐승 날짐승들의 겨우살이까지 걱정했던 스님이고 보니 흉년을 당해 백성들이 굶게 되면 그야말로 노심초사, 백양사 대중들에게 밥 대신 죽을 먹게 하고, 양식을 절약해서 굶고 있는 사하촌(寺下村)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때 만암 스님은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가 수행자가 어찌 배불리 먹고 살기를 바랄 수 있으랴. 더더구나 흉년을 당하여 모든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출가 수행자가 하루세끼 밥을 먹는다면 감히 어찌 그 밥이 목구멍을 넘어갈 수 있으리…” 윤철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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