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바욘(BAYON) 사원
③ 바욘(BAYON) 사원
  • 이우상
  • 승인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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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의 미소가 보일 때까지
앙코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사야한다. 1일권 20달러, 3일권 40달러, 7일권 60달러이다. 현지 물가로 보면 상당한 고액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90달러인 캄보디아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다.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위해 유적지 전체에 관광객의 출입을 금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실행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유적지를 지키는 관리조차 대답 대신 미소로 대꾸하니 말이다. 날짜가 적힌 손바닥만한 카드에 사진을 붙여 코팅을 해준다. 사진이 없으면 관리사무소에서 찍어준다. 1달러이다. 월드컵 도우미처럼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면 편하다. 유적지마다 입장권을 검사한다.

앙코르출입관리소는 유적지의 초입답지 않게 세련된 현대식 건물이다. 제복의 관리들이 일일이 얼굴을 대조하면서 표검사를 한다. 만12세 미만은 무료이다. 반값이라도 받으면 그 수입이 엄청날 텐데. 미래에 대한 투자인가 아니면 폴포트 정신의 계승인가. 폴포트의 병사들은 12∼16세 소년들이었다.



바욘을 가자면 앙코르 톰 남문을 통과해야 한다. 자동차를 타고 휙 지나가서는 안 된다. 누가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어서 가야할 가치가 있다. 사면에 얼굴이 조각된 거대한 고푸라(성 입구에 세운 커다란 탑이나 구조물)가 보이는 지점에서 자동차는 미리 성문을 지나서 기다리게 하고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 발목이 성하니 걱정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제국 당시에는 죄인의 발목을 잘랐다. 발목이 없는 자는 이 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바욘 사원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관세음보살. 이 사원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다.



말없는 돌, 누구의 얼굴일까

고푸라를 중심으로 좌우에 수십 명의 석상이 도열해 있다. 정확하게 좌우 각각 54개이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입을 다물었으나 위엄이 만만치 않다. 왼쪽은 악신(惡神), 오른쪽은 선신(善神)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수긍이 가지 않는다. 선과 악의 평행선 대립, 108번뇌는 그 대립에서 끝없이 분출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신장들이라는 것이다. 사찰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상과 성격이 같다는 것이다. 그 해석에 동의하고 싶다. 지금 그 신장들은 모두 불구자이다. 목이 없고 팔이 없고 코가 떨어져 나가고. 도굴과 훼손의 결과이다. 그런 흔적들은 앙코르 유적 도처에 무수히 많다. 바욘으로 향하는 호젓한 숲길만 싱싱하고 창창할 뿐 유적들은 상처투성이 이다. 그래서일까. 그나마 얼굴이 성한 석상들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다.

숲길을 지나 해자를 돌아가니 바욘이 웅자를 드러낸다. 거대한 돌에 새겨진 얼굴, 천년의 풍상을 켜켜에 덮은 채 말없이 내려다보는 얼굴. 위압적이다. 검은 돌로 이루어진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우선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친근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 얼굴상이 바욘사원의 우뚝한 탑마다 동서남북 사면에 새겨져 있다. 54개의 크고 작은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37개의 탑이 남아있다. 그 얼굴들을 일컬어 '크메르의 미소'라고 한다지만 미소가 보여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대뜸 은은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라고 감탄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듯이. 규모의 웅장함 또한 쉽게 친해지기 어려울 지경이다.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 당신이 누구냐고 묻고 싶다.

13세기에 인구 백만의 도시

바욘사원은 앙코르 톰(Angkor Thom)이라고 부르는 유적지에 속한 중심사원이다. 앙코르 톰은 앙코르 유적 중에서 유일하게 건축 당시부터 불교사원이다. 각 변이 약 3Km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각 변에는 8m 높이의 성벽을 쌓고 성벽의 바깥에는 폭이 약 100m인 수로를 파서(이것을 해자라고 한다)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내부 넓이가 약 44만평이다. '위대한 도시'라는 뜻에 걸맞게 전성기 때는 100만명이나 거주했다고 한다. 13세기에 인구 100만의 도시라니! 지금 캄보디아 전체 인구가 1100만 남짓한데. 동시대 고려 송악에는 몇 명이나 살았을까? 당시 런던이나 파리의 인구가 채 10만을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입구에 코끼리들이 어슬렁거리며 늘어서 있다. 코끼리가 없었다면 앙코르는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게가 수 십 톤씩 되는 거석들을 어떻게 옮겨올 것인가. 지금 그늘에 늘어선 코끼리들은 거대 사원을 축조하기 위해 동원된 놈들이 아니다.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사원의 외곽을 순회하는 놈들이다. 그들의 조상이 겪었던 노역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노동이다.

바욘(BAYON)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깨어진 채 입구에 팽개쳐져 있다.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는 걸로 보아 창건 당시에 만든 것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서둘러 바욘의 계단을 올라가는 이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돌이다. 돌 아닌 것은 살아남지 못했다. 바욘사원은 비구니 사원으로 자리매김된 듯하다. 사원 입구에는 어디서 옮겨온 듯한 와불에 가사를 입혀놓은 곁에 노비구니 스님이 향 공양을 권한다. 여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향불을 피웠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도 따라 한다. 위압적인 얼굴상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보여지길 기원하는 마음도 담았다.



동행한 성학 화백이 스케치한 앙코르 톰.



위대한 앙코르의 표상

얼굴의 주인은 자야바르만 7세이다. 강력한 지도력과 추진력을 가진 제왕이었다. 스스로를 관세음보살이라 칭했다. 태봉국의 궁예왕은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으나 민심을 잃어 야심이 허망한 꿈으로 끝났으나 자야바르만 7세는 위대한 앙코르의 표상으로 우뚝 서 있다. 잠깐 들르는 여행객들이 그의 미소를 느끼기에는 조금 버겁다. 시간대 별로,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표정으로 보여진다. 단번에 당신을 알고자했던 욕심이 부끄럽다. 거대함이 자애로움으로 보여지기까지는 마음을 비운 공경이 있어야할 것이다.

아직 계단도 오르지 못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외부 벽면에 새겨진 부조를 먼저 보아야겠다.



자야바르만 7세는…

방계 왕손으로 즉위 앙코르의 '광개토왕'

그는 직계 왕손이 아니라 방계였다. 1170년경 참족(베트남)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왕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지배계급은 힌두교에 뿌리를 둔 귀족들이었다. 그가 왕이 되자 중앙귀족들의 질투와 견제가 심했다.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최초로 대승불교를 들여왔고 자신을 관세음보살이라 믿게 하며 사원과 빈민구제 시설을 많이 지었다. 그의 치세에 바욘사원, 앙코르 톰, 쁘리아 칸, 니악 뽀안, 따 쁘롬, 반띠아이 끄데이 등을 세웠다. 혹자는 크메르의 광개토대왕 혹은 루이 14세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종교는 다시 힌두교로 바뀌고 국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앙코르 톰 남문에 도열해 있는 108개의 석상들

13C 中 '주달관'의 기록

'참으로 부유하고 장엄한 제국이다'

주달관(周達觀)은 중국 원나라의 사신으로 1296년 4월부터 1297년 7월까지 앙코르에 머물렀다. 그가 기록하기를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 바욘이 우뚝 섰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들과 수백 개의 돌로 만든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두 마리의 황금사자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는 황금다리가 동쪽으로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여덟 개의 황금부처가 돌로 된 방을 따라 늘어서 있다. 왕궁 위에는 또 다른 황금탑이 있으며 이 탑들을 보고 외국 상인들이 이르기를 참으로 부유하고 장엄한 앙코르제국이라고 감탄하였다'라고 그가 남긴 여행기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적고 있다. 외국인이 앙코르제국의 당대 모습을 기록한 것은 이것이 가장 먼저이다.



글·사진=이우상〈소설가·대진대 문창과 겸임교수 asdfs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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