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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디파 마〈상〉- 바로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은 여인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병들어 슬픔에만 젖어있던 디파 마는 수행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후 타인에게 정진의 원력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은 정신적 가치와 평화를 찾아 동양을 방문하였다.

그 문화적인 배경에는 인간성 회복과 자연회귀를 주장하며 탈사회적(脫社會的) 활동을 한 히피(hippie)의 가치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수행자는 그러한 미국인들에게 진실한 삶의 행복을 찾는 일을 도와준 디파 마(Dipa Ma 1911-1989)로 불리운 인도의 한 여성 수행자이다. 어린 두 아이를 잃고, 고혈압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까지 잃고 난 후 위파사나 수행을 만나게 된다.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행복을 경험한 후 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집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수행을 지도하다가 간 한 여인의 삶과 수행이야기를 『디파 마 : 한 불교 스승의 삶과 유산』(Dipa Ma: The Life and Legacy of a Buddhist Master, BlueBridge, 2005)에 의거해 소개해 본다.

그녀의 본명은 나니 발라 바루아 (Nani Bala Barua)였다. 미얀마와 인접해 있는 벵갈 동부 지역이 고향이었다. 벵갈만 지역은 12세기 이슬람의 인도 점령에 의해 인도불교가 마지막 종말을 맞이하고 난 후 현재까지 인도 내에서 불교전통을 이어온 유일한 지역이다.

어린 시절의 나니는 그 지역에서 실행되는 불교의례와 승려들에 대한 공양 불상을 만드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니의 어린 시절은 12세의 나이로 끝이 났다. 한 참 학교를 다닐 나이인 12살에 25세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14세가 되어 나니는 남편과 함께 당시 영국식민지 였던 미얀마의 수도 양곤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에게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었으며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상좌불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미얀마에 도착한 그 날부터 나니는 수행을 하려는 강한 욕구가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수행을 하지 않던 시기에 그녀는 남편에게 수행을 할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전통적인 인도의 풍습에 따라 결혼생활의 의무를 다한 후에 나이가 들어 수행 할 것을 권했다. 수행의 길에 들어설 수 없었던 나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고 공부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순조롭게 시작된 나니의 새로운 생활은 점차 불행과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낸 후 낳은 두 아이를 모두 어려서 잃고 말았다. 결혼 한지 20여년이 지나 드디어 딸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디파(Dipa)였기 때문에 이후 그녀는 디파의 어머니라는 의미인 디파 마로 불리게 되었다. 디파를 낳은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는 고혈압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 녀의 남편은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를 간호하고, 갓난 아이 디파도 보살피고, 회사일까지 해야 했다. 1957년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몸이 안 좋다고 말하고 난 몇 시간 후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디파 마는 10년 사이에 두 아이와 남편까지 잃고 자신의 건강까지 잃어버린 것이었으니 그 슬픔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수행 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불교신자로 지내온 그녀였지만 수행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양곤 시내에 있는 카마유트 수행처에서 위파사나를 배웠지만, 어린 딸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수행처에서 지내지는 못한 채 몇 년 동안 집에서 수행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당시 집안의 친척이었던 아나가리카 문인드라(1914-2003)가 머물고 있던 마하시 수행처에서 집중수행을 할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아나가리카 문인드라도 벵갈 출신의 인도인으로 1959년부터 7년 동안 마하시 스님의 지도하에 위파사나 수행을 하였고, 당시 디파 마에게 수행을 지도하였다. 수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디파 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체험을 하였다. 밤낮으로 그녀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슬픔과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마음의 평온과 분명한 앎을 경험하게 되었다.

6일 째 되던 날, 그녀의 인생은 근본적이며 돌이킬 수 없게 변화되었다. 43세의 나이에, 해탈의 자유를 찾기 시작한 지 30년이 지나는 동안 한정된 가르침과 수행 밖에 접할 수 없었던 그녀는 첫 번 째 성인의 깨달음인 소타판나(수다원)의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년 후, 집과 집중수행처를 오가며 수행을 계속한 그녀는 두 번 째 단계의 깨달음인 사카다가미(사다함)의 체험을 하였다. 이 때 그녀의 몸과 마음의 건강은 다시 한 번 변화되었다. 디파 마의 주의 사람들도 이러한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밤 사이에 병들고, 남을 의지하고, 슬픔에 젖어있던 한 여인이 건강하고, 독립적이며, 빛나는 존재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없애주는 마음챙김을 바탕으로한 위파사나 수행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디파 마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남편과 두 아이와 건강을 잃고 상심해서 괴로워하던 저의 모습을 보아왔지요.

나는 아주 괴로웠습니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제가 어떻게 보입니까? 내 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나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내 마음에는 슬픔이나 비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주 행복합니다.

만일 여러분도 수행을 한다면, 저처럼 행복해 질 것입니다. 마술은 없습니다. 단지 수행법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디파 마와 여동생 그리고 두 여인의 아이들 6명이 함께 수행을 했다. 디파 마는 자신의 딸 디파가 수행을 시작하자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인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수행을 가르치게 되자 너무 기뻤다.

1963년, 그녀의 스승인 문인드라는 그녀에게 신통력을 얻게 해주는 인도의 고대 수행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디파 마는 선정 수행을 통해 몸을 둘로 나누는 법, 마음을 읽는 법, 천상과 지옥을 방문하는 법, 전생을 기억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신통력을 배운 후, 디파 마는 그 신통력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연구자들 앞에서 시험을 보여주어 모두 깜짝놀라게 했다고 한다.

1967년, 미얀마를 떠나 캘커타로 돌아온 디파 마는 수행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위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 재성(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강사)
metta4u@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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