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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중〉- 받아쓰는 불교에서 나눠주는 생산불교로

기자명 법보신문
굶는백성 구하려 일시키고 양식 줘

어린 나이에 만암 스님이 출가한 1880년대의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가난한 형편이었다.

더더구나 네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별세했으니 만암 스님의 소년시절은 그야말로 궁핍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 옛말이 있듯이, 만암 스님은 어린 나이에 혹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훗날 스님이 된 후 흉년이 닥치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굶주리는 백성들의 호구지책이었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농촌은 아직 수리시설도 형편없었고, 영농기술도 발전되지 못했고, 비료, 농약, 농가구 어느 것 하나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가 없었고, 또 걸핏하면 홍수가 나서 농사를 망쳤다. 이럴 때 죽어나가는 건 힘없고 돈 없는 농민들뿐이었다. 그래서 만암 스님은 흉년이 들면 백양사 대중들에게 밥 대신 죽을 먹게 하고 양식을 아껴 끼니를 굶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백양사 앞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개천이 있고, 이 개천 위에 쌍계루가 멋지게 서 있다.

어느 해 봄이었다. 그 해에도 흉년이 들어 수많은 농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만암 스님은 느닷없이 원주를 불러 아랫마을 농민들을 데려다 백양사 앞 흐르는 개천에 보(堡)를 막아 쌓는 일을 시키도록 분부했다.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잘 흘러내려가는 개천에 웬 보를 쌓고 물을 막아 놓자는 것인지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백양사 앞을 흐르는 개천은 저 위 백양봉에서 흘러내려 쌍계루를 지나 백양사 앞을 거쳐 저 아랫마을로 저절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개천에 돌을 쌓아 보를 만들고, 그 보의 높이만큼 물이 고이게 막는 공사를 벌이겠다는 게 만암 스님의 느닷없는 계획이었다.

“스님, 어쩐 일로 보를 막자고 하시옵니까?”
“왜 보를 쌓는지는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것이니 우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일할 사람부터 불러 오도록 하시게.”
“몇 명이나 불러오도록 할까요?”
“다다익선이니 많이 불러 모으시게. 헌데 한집에서 여러 사람을 부르면 아니 되니 한 집에서 한 사람씩, 되도록이면 빠지는 집이 없도록 하시게.”
“아니 그럼 운력이라도 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요?”
“운력은 이 사람아, 농민들을 어떻게 운력을 시켜?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어야지.”
“예에? 품삯까지 줘가면서 보를 쌓으신다구요?”
“품삯은 곡식으로 준다고 미리 말씀드리게. 아시겠는가?”

만암 스님이 개천에 보를 쌓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되, 그냥 주면 농민들의 자존심이 상할 일이니, 개천에 보를 쌓는 일을 시키고, 그 노동의 대가로 곡식을 나누어주면 농민들도 떳떳하게 양식을 벌어 연명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게 만암 스님의 깊은 뜻이었다.

백양사 앞 개천에 막아놓은 보는 바로 이런 만암 스님의 자상한 배려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 적마다 뜯었다가 만들었다가 몇 번을 되풀이하면서 공사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뿐만 아니라 만암 스님은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품삯 대신 곡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봄이면 일부러 단풍나무, 치자나무, 감나무 묘목을 사다가 백양사 인근 산에다 심도록 조림작업을 시켰다. 그 덕분에 오늘날 백양사 단풍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절 마당에 연못 만든 뜻은…

만암 스님은 백양사 마당에 연못을 파기로 작정하고 일꾼들을 불러오게 했다. 절 마당에 연못을 만들다니, 이것도 참으로 뚱딴지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절 마당에 연못을 파기로 한데는 두 가지 깊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전각에 불이 일어났을 경우 소방수로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이요, 둘째는 연못을 파면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곡식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암 스님은 과연 먼 훗날의 일을 미리 예측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절 마당에 파놓은 연못 덕분에 백양사 전각 가운데 향적전이 살아남게 되었다.

6.25한국전쟁 후, 공비소탕에 나선 국군부대가 내장산일대의 무장공비 출몰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백양사의 모든 전각을 태우러 왔었다. 이에 만암 스님이 결단코 반대, 만일 법당에 불을 지르면 나도 타죽겠다고 결연히 나서는 바람에 국군장교가 차마 마당과 다른 전각에는 불을 지르지 못하고 향적전 한곳에만 불을 지르고 내려갔다. 이 때 만암 스님과 모든 대중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연못의 물을 퍼다 향적전에 붙은 불을 끌 수가 있었으니, 만일 절 마당에 연못이 없었다면 향적전은 별수 없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양사의 수많은 전각들이 임진왜란 등 옛날의 전란에 여러 번 불타버린 과거가 있었으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키 위해 절 마당에 연못을 파 거기에 물을 가득 담아놓기로 했던 것인데, 결국 그 때 만암 스님의 선견지명 덕분에 향적전에 지른 불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암 스님은 1950년대에 이미 사찰경제의 변화를 시도하고 오직 시주에만 의지하던 사찰살림도 자립경제 기반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해 반농반선을 결행, 수행자들로 하여금 대바구니를 짜고, 꿀벌을 치고, 곶감을 만들고, 치자나무를 식재해서 약용치자를 수확하게 하는 한편 백양사 농토를 승려들이 직접 운력으로 경작케 하여 일년에 겨우 40석 거둬들이던 벼를 일년에 800석 수확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

만암 스님은 “받아먹기만 하는 불교는 망하고, 나누어 줄줄 아는 불교라야 산다”고 역설, ‘시주만 받아먹고 사는 불교’에서 ‘생산하는 불교’를 주창하고 몸소 실천에 옮기신 분이었다.

윤청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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