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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慧山) 사형을 기리며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5.07.12 10:00
  • 댓글 0

특별 기고

평생 청빈과 벗삼은
다정다감한 수행자

선지식 함께 모시던
고결한 삶 못내 그리워


혜산 사형님! 이제 이승을 떠나신 겁니까? 『금강경』의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항상 되새기고는 하였지만, 이렇게 사형의 죽음을 겪고 보니 정말 인생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이제 사형님을 변산 앞바다에 유골로 뿌리고 돌아오는 저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자에게는 죽음같이 큰 법문은 없습니다. 풀잎에 이슬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기는 하지만, 그 이슬이 머무는 것과 같은 짧은 이승에서 저와 사형의 인간적인 정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제가 사형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봄으로 기억됩니다. 서해 변산반도의 붉은 석양이 장엄하게 펼쳐지던 내소사 앞 석포리. 그 석포리에서 저녁 7시쯤에 사형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제가 마중을 나갔었지요. 그때 사형님을 처음 만나 내소사 앞에 그윽하게 서 있는 전나무 숲을 따라 내소사로 들어오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 때 구도의 신심에 불타 있던 사형님과 함께 숲 속 길을 걸어오면서 함께 맡았던 전나무 숲의 향기도 제 비근(鼻根)과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었던’ 스승님 해안(海眼) 대종사님을 형님과 제가 모시면서 같이 살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형님이 밥을 하면 저는 반찬을 하고, 제가 밥을 하면 형님은 반찬을 해서 스승님께 공양을 올렸었지요. 새벽에 형님이 종을 치면 제가 도량석을 하고, 또 제가 종송을 하면 형님께서 도량석을 하셨습니다.

60년대 후반 스승이신 해안 큰스님께서 충청도 보덕사에 법문하러 가실 때마다 동행했던 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가벼운 녹음기의 배터리가 없었습니다. 형님은 무거운 녹음기를 들고, 저는 스승님의 가사를 들고 버스를 바꿔 타기 여러 차례…, 그 머나먼 보덕사까지 함께 갔던 것은 또 몇 번이었던가요. 그때 녹음기를 무릎에 올려놓았던 형님의 무릎 가사가 너덜너덜 해졌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형님과 같이 탁발을 다닐 때도 무거운 것은 모두 형님이 지고, 가벼운 것은 저더러 지게 했던 그 모습들이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스승님을 모시고 함께 정진을 할 때 형님께서 먼저 점검을 받으러 들어가시면 그 뒤에 제가 들어가고, 혹은 제가 먼저 들어가면 형님께서 뒤따라 들어오셨던 기억들. 추운 겨울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할 때면 제일 먼저 스승님께서 목욕을 하시고, 그 다음에 형님이 하시고, 마지막으로 제가 목욕을 했던 일. 얼마나 가난했던지 오전에는 정진을 하고, 오후에 울력을 해야 했는데, 손이 터져 피가 나는 힘겨운 날들이었지만 저는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일년에 한두 번 두부를 사다가 함께 공양을 올리고, 죽을 쑤어서 나눠 먹던 일들, 무엇 하나 함께 하지 않은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이 제 평생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병원에 3개월 동안 입원해 있을 때 하루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시고 치료와 간병을 해주셨던 일이며, 어린 나이에 해인사로 공부하러 떠날 때 손수 짐을 꾸려서 차에 태워주셨던 그 은혜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일구월심 전등회(傳燈會)를 살리려고 내소사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불사를 하면서 병을 얻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걸음에 달려가 뵙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끝내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고 홀연히 입적하셨다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혜산 사형님! 언제 다시 ‘은산철벽’ 회상에서 한 스승을 모시고 같이 살 수 있을지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사형님께서 애쓰신 덕분에 내소사는 대가람으로 중창되었습니다. 서울의 전등사 또한 제가 미력하나마 힘을 기울인 결과 기도와 참선 도량으로 기틀을 다졌습니다. 앞으로는 후학들이 잘 운영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사형님, 아니 형님! 어찌되었거나 대사(大事)는 역시 생사(生死)입니다. 30년 전 무렵 해안 스승님이 열반에 임박하였을 때 형님과 제가 같이 스승님께 “입적하시고 나면 비문에다 어떤 내용을 적어 놓을까요?”하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스승님께서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는 단 한마디 말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스승님 비문에는 오직 이 글자만 새겨져 있다는 것을 형님도 잘 아실 겁니다. ‘생사는 이것이지만, 이것은 생사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형님을 보내면서 하고 싶은 말은 ‘생사어시 시무생사’ 이 한마디 뿐 입니다. 사제 동명 분향 합장


전등선원 선원장 동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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