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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타이완 인슌 스님 입적

기자명 법보신문

현장 이래 최고 승려 평가
중국불교 중흥의 기수

국제 불교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슌(印順) 스님이 100세를 넘긴 지 두어 달 만인 지난 6월4일 고요한 새벽길을 따라 저승으로 건너가자, 타이완 언론들은 저마다 현란한 제목 아래 그의 입적 소식을 일제히 머리기사로 뽑아들었다. 언론과 불교계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 같은 정치가들도 앞 다퉈 ‘애도전선’에 동참했다.

그건, 불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그리 날 뛰지 않던 타이완 사회 분위기를 놓고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만큼, 인슌이 큰 인물이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무렵 타이페이에서 정치판을 취재하고 있던 나는 요란한 인슌의 입적 소식과 냉담한 시민들의 반응 사이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초호화판 배우들을 총동원하고 엄청난 선전비를 뿌려댄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뒤 쓸쓸히 막을 내릴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류의 아쉬움과 흡사했다.

어쨌든, 인슌은 인간불교(人間佛敎)라는 철학을 후배들에게 화두로 남겨 놓고 떠났다.

사진은 생존 당시 인슌 스님의 모습

인간불교-현실참여 강조

1906년 중국 쩨치앙의 하이닝에서 태어나 불교서적을 통해 종교적 의지를 키우던 인슌은 25세가 되던 1930년 승려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어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참패한 장쩨스가 국민당(國民黨)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쫓겨나자, 인도 타이완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인슌은 1950-1960년대 ‘인간불교’를 내걸고 사회 속으로 파고들면서 타이완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인슌은 ‘인간불교’의 기본 이념이자 행동철학으로 “수도원사회는 반드시 속세에 종사해야한다”고 설파하며 불교 자선재단을 통해 의료, 보건, 교육, 문화사업에 정열을 바치기 시작했다.

인슌의 제자이자 타이완 최대 자선단체인 쭈치재단 창설자로 유명한 쳉엔(證嚴) 스님은 “모든 영감을 인슌으로부터 받았다. 내가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인슌을 만났기 때문이다”며 “지난 40년 동안 쭈치재단이 펼쳐 온 모든 자선사업은 인슌의 가르침인 ‘사람을 위한 봉사’를 받들었던 결과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인슌은 1972년 일본 타이쇼대학에서 중국선종사(中國禪宗史)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최초의 학승으로도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쉬 차오후이 교수(釋昭慧. 슈안추앙대학)는 “불교를 학문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 인슌은 미신과 우상숭배가 마하야나(Mahayana)불교를 난파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또 한편으로는 종교간 화합을 주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슌을 “한 마디로 숨넘어가는 중국불교를 소생시켜 중흥을 이끈 장본인”이라 불렀다.

이런 인슌의 궤적만을 놓고 보면 타이완 언론들이 그에게 붙였던 경칭은 별로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인슌이 외쳤던 ‘인간불교’는 쉥엔(聖巖)과 신윤(星雲)과 같은 승려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자선사업뿐만 아니라 환경운동 같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인슌은 불교의 ‘현실참여’를 거북하게 바라본 국민당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박해를 받기도 했다.

종교간 화합 주창

그렇게 불교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슌은 타이완 사회에서 ‘큰 인물’로 각인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오히려 인슌이 거부했던 ‘우상숭배’라는 틀 속에 그를 가두고는 인슌을 거대한 ‘미신’으로 재창조하고 말았다. 때문에 그 동안 타이완에서 ‘인슌과 그 철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침묵 속의 금기가 되고 말았다.

“타이완 학계에서는 인슌의 불교철학과 삶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피하는 경향성이 있다.” 손꼽히는 진보학자인 펭 치엔산 교수(馮建三. 국립정치대학)는 “이제라도 학자들이 인슌의 사회-정치적 철학과 불교적 해석을 전면 재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타이완 학계가 인슌 재해석을 공론화시키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듯 보이지만, 진보적인 학자들 사이에는 그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이들은 인슌이 자신의 불교 철학을 ‘무정부적 사회주의 공동체’라고 규정했던 부분을 중요한 화두로 여겨왔다.

그럼에도 인슌의 해부는 여전히 만만찮은 장벽들로 둘러쳐있다. 1949년 타이완으로 쫓겨 온 국민당 정부가 무려 40년 동안이나 지배도구로 활용해왔던 계엄령을 1987년 해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껏 타이완 학계를 비롯한 사회 전 부문이 냉전적 분위기에 눌려 인슌의 그 ‘무정부적 사회주의 공동체’ 철학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이념이나 철학에 대한 연구를 한 물간 유행쯤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학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인슌 비판은 시기상조

정치학자인 첸 이청(陣宜中. 中央硏究院人文社會科學硏究中心)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아래 14만 여명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수난 당했지만, 아직 그 실체조차 명확히 드러난 적이 없다”며 척박한 연구 풍토를 탓했다. 타이완에선 드물게 맑시즘(Marxism) 연구자인 첸 이청은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이 모두 편의에 따라 인슌을 재단해 오면서 결국 ‘미신’으로 뒤덮고 말았다. 국제사회에서는 불교와 사회주의 비교연구가 이미 상당히 축적된 상태지만, 타이완에서는 그런 기회마저 없었다. 따라서 인슌의 철학을 탐구해 보는 일은 불교사상의 확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말하자면, 혼란 없이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이승의 청정한 땅’을 건설하기 위해 보살과 일반인들이 함께 일하자고 외쳤던 인슌의 불교 철학은 꼴통식 냉전정치에 사로잡혀 본디 의미마저 제대로 풀이해 볼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겉보기에 드러난 인슌의 자선사업이나 놓고 옳네 마네 집적대다가, 어쩌다보니 그이를 ‘큰 어른’으로만 모셔왔을 뿐이다.

이처럼, 인슌에 대한 과학적인 탐색도 그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도 없이 그저 100수를 누린 큰 어른이라는 감상적인 ‘위인전’이 나도는 타이뻬이 기운은 한국불교와 아슬아슬한 맥을 대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한국 불교가 고승들의 철학을 탐색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그이들의 기이한 행실을 쫓아 엽기적인 ‘고승영웅전’을 만들어내고 만 오늘의 사태와 일맥상통한다.

타이완판 ‘현장(玄) 이래 최고 승려’와 한국판 ‘일갈대성으로 호랑이를 쫓은 고승’ 사이에는 어떤 공동음모가 서려있을까?

이 한 낱, 꿈길 같은 떠들썩함은 인슌이 뜻했던 ‘인간불교’의 본령이 아닐진대…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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